[경일춘추]꽃의 위로
[경일춘추]꽃의 위로
  • 경남일보
  • 승인 2021.03.3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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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뜬금없는 나들이다. 진주에서 하동까지 잘 닦은 2번 국도를 고속도로처럼 빠르게 달린다. 쭉 뻗은 4차선이 막힘없이 뚫린다. 우환이 아니라면 미어질 이 길. 물러 난 옛길에 벚꽃 행렬 꿈결 같다. 조용한 산촌에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대문마다 돌담마다 몽글몽글 피어난다.

잠시 조는 사이 하동포구다. 강 건너 억불봉. 뭉툭하게 돌출한 봉우리의 생김새가 멀리 보이는 백운산과는 다르게 특이하다. 강 이쪽 형제봉은 지리산의 여맥이다. 그 사이 섬진강 유려한 곡선이 봄기운과 함께 감아 돈다. 연둣빛 능수버들 강바람에 늘어진다. 악양면 만경들판 감개무량 펼쳐진다. 삽상한 공기를 눈으로 마신다. 자애로운 햇빛도 눈으로만 느낀다. 귀농한 인구들이 맹목으로 터 잡은 산기슭 명당들이 덕담처럼 따뜻하다. 가로수 사이로 명물 부부송이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먹점마을에서 10분이면 당도할 화개장터가 눈앞에서 멈춘다. 드라이브 스루로 가다서다 반복하다 꽃길 한복판에서 옴짝달싹 않는다. 덤으로 얻어 보는 축복 같은 꽃사태다. 촬영하는 춘객들 뒤에 두고 마흔 넘긴 고목들이 장쾌하게 품을 연다. 확고하고 대담하다. 꽃의 진동, 꽃 화산이 하늘까지 닿는다. 휘늘어진 가지들도 덩달아 열광한다. 탄성들이 여기저기 터진다.

쌍계사 시오리 길.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다. 김동리의 역마로 운명적 굴레를 반추하는 길이다. 언제 걸어도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던 소설 속 그 사나이 걸어올 것만 같다. 온갖 떠돌이 인생들이 화개장터로 몰렸다. 지리산 더덕 캐고 산나물 봇짐 진 화전민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방물장수 항아장수 구례서 내려와 막걸리에 시름 풀고 설움 견딘 공간이다. 박하분 동백기름 아련한 그런 정취 모두 다 사라지고 현대판 상가들이 장터를 차지했다. 오지 않는 남정네 평생을 기다리던 주막집 늙은 노파 쇠된 목소리, 육자배기 장탄식도 들을 길 없다. 말 못하는 객들만 거리 둔 보폭으로 기웃기웃하다 간다.

쌍계사 초입이다. 계곡물 가까운 자리 찾아 도토리묵 시킨다. 꽃그늘 평상위로 보름달 휘영청 하고 원광의 달빛이 사하촌에 앉은 객을 부드럽게 바라본다. 불일폭포 얼음 녹은 찬 물살 가세하여 흐르니 난세가 환상 같다. 팽창한 환상 품고 돌아가는 밤길이다. 동맹한 꽃과 달이 포구까지 따라온다. 쾌활한 자태와 청초한 눈빛에 섬광 같은 암시 담아 ‘잘 가시라’배웅한다. 결말 없는 시절을 위로하는 꽃들이다. 꿈같은 하루 흥취다.

이정옥 (진주문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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