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칼럼] 나의 가장 큰 슬픔
[대학생칼럼] 나의 가장 큰 슬픔
  • 경남일보
  • 승인 2021.05.06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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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1일.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자 나에게 가장 큰 슬픔이 찾아온 날이다.

우리 가족은 명절마다 할머니를 뵈러 충청북도 보은을 갔다. 노란색 대문과 사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 손잡이를 보면 내 마음은 항상 두근거렸다. 나는 할머니 집에서 작은 방과 부엌을 제일 좋아했다. 작은 방에는 장기와 바둑, 옛날 장난감, 방 한 면을 채우는 인형들이 있어 심심할 틈이 없었다. 밤에 두꺼운 이불 속에서 늦게까지 사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귀뚜라미 소리에 잠들곤 했다. 부엌은 유독 할머니 특유의 향이 많이 나서 하루에 5번 이상은 들어갔다.

중학교 2학년 설날은 바빠서 할머니 댁에 가지 못했다. 할머니를 잊고 살 때쯤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화하며 우리 자매를 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병원을 가는 동안 차에는 적막이 흘렀다. 청주 큰 병원에 도착했고 병실 문 창가에 머리카락이 없고 아주 말라서 앙상해 보이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 사람이 우리 할머니였다. 암이 이미 말기에 접어들어 온몸에 퍼져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힘이 없어도 할머니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손을 꽉 잡았는데 살가죽만 남은 그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2주 동안 나와 엄마는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사실 장례식 동안의 기억이 거의 없다. 향이 꺼지면 할머니의 영혼이 오지 못한다는 엄마의 말에 향이 꺼질까 봐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것만 희미하게 기억난다. 할머니의 뼈가 곱게 가루가 되는 순간, 조그마한 무덤이 만들어지는 순간마저도 울지 않았다. 할머니의 사진이 왜 국화꽃들 사이에 있는지, 아빠와 엄마, 사촌들과 장례식장에 오는 사람들이 왜 우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냥 다 꿈인 것 같았다.

그러나 장례를 마치고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할머니 집에 갔을 때 노란 대문 앞에 마중 나온 할머니가 없었다. 부엌에서 나에게 맛있는 거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열심히 요리하던 할머니가 없었다. 그 순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의 온기가 남아 있는 부엌에서 엄마에게 안겨 1시간 가까이 울었다.

아직도 할머니가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노란 대문 앞에 나를 마중 나올 것만 같다. 나는 이제 스스로 돈도 벌고 시간도 많은데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수국 한 다발을 선물할 수 없다. 그 흔한 “할머니 고맙고, 사랑해요.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매일 꿈에 할머니가 나오길 바라면서 잠을 청한다. 꿈에서라도 만나 수국 한 다발을 전해주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주희 (경남대학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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