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키나발루산의 흰꽃
[경일춘추]키나발루산의 흰꽃
  • 경남일보
  • 승인 2021.06.0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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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 (진주문협이사, 경해여중교사)
 

 

산책길 나섰더니 웃자란 망초꽃 순백의 하얀색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삶이 고달파도 말갛게 살아가는 민초 같은 꽃이다. 봄꽃 지고 신록의 기쁨도 잠시, 곧바로 여름이다. 유월에서 초가을까지 담초록 짙어가는 산야에 흰꽃 천지다. 찔레꽃, 함박나무꽃, 쥐똥나무, 흰철쭉, 미선나무, 딸기꽃나무, 산사나무, 층층나무, 아카시아 꽃나무. 깨끗한 흰꽃들 단정한 녹음과 조화롭게 상생한다.

여름꽃은 봄꽃이나 가을꽃보다 단순하다. 색도 향기도 절제된 여운으로 종의 번식 꾀한다. 오랜 경험에서 숲속의 곤충들 좋아하는 흰색으로 진화했다. 그래놓고 스스럼없이 피었다가 만만하게 살아간다. 피고 싶은 대로 피어나고, 자라고 싶은 데서 마구 자란다. 모난 것도 귀한 것도 없이 담담히 산다.

몇 년 전, 말레이시아 키나발루산(4101m)을 갔다. 영혼의 안식처, 혹은 바람 아래의 땅이라는 의미를 로우스피그 정상에서야 깨달았다. 동남아 최고봉, 산이전 산이라는 예찬도 적도의 붉은 일출이 거두절미했다. 두 번 못 볼 새 세상이었다. 날고 기는 산꾼들이 해발 3000m고지에서 속속 낙오됐다. 고산증으로 라반라타 산장(3353m)까지 포터에 의지했다. 짐꾼 속에 어린 남매가 있었다. 반바지에 흰 베신이 전부인데 제 몸보다 큰 짐을 지고도 축지법 쓰듯 산을 탔다.

편도 7시간 산길을 매일 왕복하며 돈 벌었다. “공부하고 싶지 않니” 했더니, “엄마가 돈 벌어 오랬어요. 그래야 먹고 산다고”했다. 아무런 자리라도 천명과 천직인 줄 알고 뿌리내리는 찔레꽃, 망초꽃이 떠올랐다. 흰꽃처럼 여린 외모로 험한 일 하는 아이가 하산길 내내 밟혔다.

우리도 이런 사연 있었다. 해외파견 광부나 독일 간호사 말고도 남의 집 식모살이로, 방직공장 여공으로, 버스 차장으로 누이들 내몰렸다. 때로는 오빠나 남동생 공부까지 책임졌다. 원망이나 비탄 없이 제 운명 껴안고 감내했다. 자기 입신이나 이데올로기 따위의 셈법에서 나온 가짜 희생이 아니라 정화수 같은 헌신이었다.

인간고, 금전고에 피폐한 날들이다. 집을 나가본들 초여름 삽상한 공기와 흰꽃의 청초함 말고 뭐가 있겠나. 은사의 풍모처럼 점잖고 기품있는 흰꽃을 방편으로 코로나에 할켜진 쓰라린 상처 치유되면 좋겠다. 자연의 담백함과 꽃의 천진함으로 은 것, 가버린 것, 변해 버린 것에 집착 안고, 모두 다 ‘여기까지려니…’ 하고 마음의 짐 내렸으면 좋겠다. 이정옥 (진주문협이사, 경해여중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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