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59]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59]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 경남일보
  • 승인 2021.06.2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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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어느 도시를 가든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궁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영국에 가면 버킹엄 궁전 등이 가장 대표적이다.

비엔나 역시 궁전 관람 때문에 바쁜 하루를 보내야 할 만큼 유명한 명소들이 많은데, 이것은 비엔나가 유럽역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던 합스부르크왕가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왕실을 600여 년 간 지배 했고, 유럽 대부분의 왕실과 연결 되어 있다. 비엔나의 가장 중심가에 위치한 호프부르크 왕궁은 13세기 무렵 건축 되어 합스부르크가의 왕궁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대통령의 관저가 되었고, 1900년대 초 까지 왕실의 궁전으로 쓰인 쇤부른 궁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무려 1400여개가 넘는 방을 갖추고 있는 쇤부른 궁전의 경우 그 규모에 압도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곳이 왕가의 여름 별장용으로 쓰였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란다. 어디 이뿐이랴. 클림트의 ‘키스’를 소장하고 있는 벨베데레 궁전 또한 합스부르크가의 미술 수집품 보관소로 사용됐으니, 비엔나 도시 전체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흔적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으리으리한 궁전 한 곳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바닥나기 십상이지만, 그래서 일까.

비엔나에는 맛있는 디저트가 유난히 많다.

특히 보는 것만으로도 달콤함이 혀끝에 느껴지는 자허 토르테는 비엔나에서 탄생한 초콜릿 케이크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장식이 없어서 일반 케이크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1832년 ‘자허’라는 요리 견습생이 우연한 기회로 만들게 된 이 디저트는 비엔나를 찾는 이들 누구나가 맛보고 싶어 하는 명물이 되었다. 케익 시트 사이에 묻어 있는 살구 잼과 초콜릿의 조합은 하루의 피곤함을 달래기에 제격이다. 커피 한잔과 자허 토르테로 기운을 차렸다면, 이제는 박물관으로 갈 시간이다.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에서 예술 관련 박물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은 시내 중심에 위치하여 자연사 박물관과 얼굴을 맞대고 있다. 187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요셉1세의 명령으로 두 박물관이 나란히 문을 열었다. 미술사 박물관의 건립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미술수집품을 전시하여 대중들에게 공개하기 위함이었다.

웅장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박물관의 외관도 훌륭하지만, 내부는 그 어느 유럽의 박물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다. 시선을 사로잡는 천장 벽화와 장식은 이곳이 박물관임을 잠시 잊게 만든다. 그 중에서도 구스타프 클림트가 벽화작업을 통해 명성을 쌓아가던 시절의 그림들을 박물관의 높은 천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박물관에서는 2018년 클림트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지상 12m높이에 지지대를 설치해 클림트의 벽화를 관람객들이 보다 가까이서 만나 볼 수 있도록 특별전시를 열었던 바 있다.

 
 
◇대 피터 브뤼헬

박물관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화가 대 피터 브뤼헬(Pieter Bruegel the Elder,1525-1569) 은 르네상스 시대에 플랑드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화가다.

그는 농민들의 일상을 담은 장르화와 풍경화, 종교화 등을 주로 그렸는데, 장르화는 종교화와 풍경화 등으로 구분 짓기 힘든 어떤 계층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다룬 그림들을 일컫는다. 브뤼헬은 농민들의 일상에 집중한 장르화를 예술의 정점으로 이끌어 놓은 개척자로 여겨진다. 그는 16세기 무렵 출판업의 중심지였던 안트베르펜에서 인쇄물에 삽입되는 그림을 디자인 하다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브뤼헬이 활동 했던 시기에는 많은 화가들이 이탈리아로 건너가 그곳의 독특한 화풍을 습득하는 것이 유행처럼 여겨졌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던 화가들의 캔버스에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건축물과 이탈리아 화풍 등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곤 했다. 브뤼헬 역시 이탈리아로 건너 간 적이 있었지만 알프스 이남의 예술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농민들의 일상을 즐겨 그린 브뤼헬에게는 ‘농민의 브뤼헬’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1567년 그린 ‘농가의 혼례’ 에서는 차려진 음식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잔칫날 빠질 수 없는 음악과 함께 모든 이들이 결혼식을 즐기고 있다. 같은 해에 그린 ‘농민들의 춤’ 또한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생활을 엿보게 하며 흥겨운 음악소리와 어우러지고 있는 춤사위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인다.

‘농민의 화가’라고 하면 만종, 이삭줍기 등을 그렸던 프랑스의 화가 밀레(Jean Fran?ois Millet,1814~ 1875)가 번뜩 떠오르지만, 브뤼헬이 그 보다 300여년이나 앞서 농민들의 삶을 그렸던 원조 ‘농민 화가’였던 것이다. 그것도 긍정의 기운을 한껏 북돋아 주는 즐거운 농민들의 모습을 말이다.

브뤼헬의 가족들 중에서도 화가로 활동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별칭이 자주 쓰이며, 특히 아들 피터 브뤼헬(Pieter Brueghel the Younger,1564-1638)과는 이름까지 똑같은 나머지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각자의 이름 앞에 대와 소를 붙여서 표기한다. 브뤼헬의 그림은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조그맣고 사소한 것을 예술적 감각으로 돋보이게 만든 그에게 어쩌면 별것 아닌 평범한 일상이 가장 좋은 주제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마흔 살을 조금 넘긴 짧은 생을 살았던 브뤼헬의 그림은 약 40여점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12점의 작품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서 만나 볼 수 있다.다.

 
 
◇인간의 욕망을 그리다

박물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브뤼헬의 그림이 있다면, 단연코 ‘바벨탑’이다.

농민의 화가가 성경 이야기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라 더욱 특별한데다가 브뤼헬만의 정교함과 섬세함이 이 그림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브뤼헬은 세 번에 걸쳐 바벨탑을 그렸다. 다작을 하지 않았던 그가 세 번이나 같은 주제로 그렸던 것을 미루어 보아, 바벨탑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세 작품 중 하나는 오래전 유실 되었고 현재 한 점은 비엔나에, 한 점은 네덜란드에 있다. 브뤼헬의 바벨탑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 시킨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지 10년이 넘어서야 이 작품을 그렸지만 콜로세움을 염두하고 그렸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림속의 바벨탑은 세상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데 아직 매끄럽지 못한 외관을 보니 미완성인 듯 보인다. 히브리어로 ‘혼돈’이라는 뜻을 지닌 바벨의 뜻을 이해하고 나면 그림이 결코 멋진 건축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바벨탑에 관련된 이야기는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에 등장한다.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고 싶어 했던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에 분노한 신이 저주를 내렸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더 이상 단일 언어를 쓰지 못하고,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하게 되어 오해와 갈등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브뤼헬은 이 바벨탑 이야기를 접한 뒤 작품에 영감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벨탑에서는 수평선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탑은 기초 공사가 부실해 보이고 심지어 몇 군데가 무너지는 모습도 발견 할 수 있다. 거대한 바벨탑에 비해 그 속에 그려진 인간은 붓질을 어떻게 했을까 싶을 정도의 작은 점 크기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을 멀리서 보면 아예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세하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탑을 쌓아 가고 있지만 탑의 상부는 이미 기울어져 완벽한 상태로의 완성이 어려워 보인다. 브뤼헬은 이 그림을 통해 인간이 탑을 쌓으면서 하늘과 가까워지고 있지만 사실은 어느 한군데 튼튼한 곳이 없는 부실한 탑의 모습을 보여주며,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과 허영심은 결국 균열과 파멸을 부른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주소: Maria-Theresien-Platz, 1010 Wien

운영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 휴관)

입장료: 성인 16유로, 19세 이하 무료

홈페이지: https://www.khm.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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