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수의 밖으로 얼굴을 내놓은 초로의 주검
딱히 응혈 진 암흑이 있어
벌떡 일어나 천둥 칠 것 같지는 않다
꽃상여에 뉜 단 한 줄 적멸의 문장, 애 터지게 느리고 길다
-고진하 시인의 ‘적멸의 문장’
망자는 흰 천 한 벌 두르고 대나무로 짠 관대의 상여를 타고 간다. 붉은색 계열의 천이 아닌 것으로 보아 초로의 주검은 남자이다. 누구나처럼 한 생을 버겁게 살아낸 흔적들이 잠과 함께 누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응혈 진 암흑’ 같은 표정도, 죽음을 억울해할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니 이보다 편안한 죽음은 없다.
바다 유목민 바자우족은 한평생을 바다에서 살다 죽어서야 생애 어느 때보다 화려한 복장을 하고 육지에 묻힌다는데, 망자는 갠지스강의 물로 입을 적시고 전신을 정화한 후, 노천 화장장을 거쳐 한 줌의 전 생이 강으로 갈 것이다. 살아생전 잠시잠시의 환희와 끊이지 않았을 너절한 애환들을 지상의 가장 간소한 행장과 생애 가장 짧은 문장으로 꾸렸다. 죽음의 문장이 짧은 만큼 ‘애 터지고 느리고 길’ 수밖에 없다,(시인 · 두원공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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