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홍의 경일시단] 고백 (권선숙)
[주강홍의 경일시단] 고백 (권선숙)
  • 경남일보
  • 승인 2021.09.2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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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홍의 경일시단] 고백 (권선숙)


순두부 집에서 옛사람과 맞닥뜨린 뒤
저만치 대각선으로 앉았다
한 번 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면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읽히지 않는 그 순간 편안해서
잠시 모자를 기억의 잠금장치로 삼는다
한때는 와글와글 뚝배기 순두부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던
너무 뜨거워 데인 곳이 상처가 되어버린
젊은 날의 사랑이여
함석지붕 위에 얹히는 늦은 오후의 햇살같이
멀리서 눈부시기만 한
너무 짧아서 잡히지 않는
내 사랑아, 떠나라
한동안 햇살이 데워 놓은 훈기로
밤마다 등줄기가 뜨듯했노라고
이제,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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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옛사랑을 좁은 공간에서 만난 당혹감, 화들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겨우 눈빛만 모자 밑으로 감추며 숨을 삼키는 장면이 시적 생동감으로 스며든다. 금세 알아챌 모습들을 애써 모른 척해야 하는 순간, 탱탱한 긴장이 함석지붕의 햇살처럼 뒹굴고 사랑에 데인 옛 상처가 도져서 화끈거리겠다. 함부로 다가가 인사를 나누지 못하는 모질게 뜨거웠던 사랑이었거나, 실타래를 풀다가 매듭으로 끝난 사랑이었거나, 진정 짧아서 끈을 놓친 사랑이었거나, 격정의 한때를 화두로 던지며 아직 온기를 고백하는 시인의 심기가 당차다. 원망이 없는 이별은 더욱 넉넉하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 청마의 시 구절을 읊어본다.

/경남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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