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여우굴
[경일춘추]여우굴
  • 경남일보
  • 승인 2021.11.01 13:5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정희 시인·프리랜서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는 얼어붙었다. 몇 시쯤 됐을까?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등줄기로 타고 흐르는 땀으로 교복은 젖어있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발이 꼼짝을 않는다. 길옆에 있는 저 시커먼 바위가 나를 집어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미쳤을까? 실은 미쳤어도 ‘책’에 단단히 미쳐 있었다. 독서를 유난히 좋아해서 책이 있는 친구라면 어디든 따라가서 책을 빌려 오곤 했었다. 친구 하나가 자기 집에 가자고 했다. 온 방 가득 메운 책장 속의 책과 벽에 가득 쌓인 책을 보고 그만 눈이 뒤집혔다. 빌린 책 외에 한 권만 읽고 간다는 것이 책 속에 빠져서 그만 버스를 놓쳐버렸다. 

10km나 되는 비포장도로를 걸어가야했다. 어두워지기에 빨리 걸어야 했다. 무거운 책가방을 양손에 번갈아가며 들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황금 들판을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차들이 점점 뜸해졌고 들녘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하이면 파출소를 지나자 산들이 검은색을 토하며 나를 노렸다. 지금부터가 문제다. 사곡을 지나면 공동묘지가 있는데, 그 바로 밑에 벼락 맞은 큰 바위에 여우굴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삼천포 장날을 오갔던 하일면 사람들이 여기 여우에게 홀려서 죽었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더 이상 걷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무서움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야!” 소리쳐 봤지만, 이미 머리칼은 꼿꼿이 선 상태였다. ‘전설의 고향처럼 요망한 여우가 이제 저 굴에서 튀어나와 동서남북으로 내 몸을 뛰어넘어 혼절시켜 놓고, 내 간을 빼먹을 것이야.’ 도망을 치려해도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물과 식은땀은 범벅이 돼서 간간한 울음을 돋우었다. 극심한 공포에 떨면서도 여우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여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여우는 그 굴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있지도 않은 함정에 빠져 ‘스스로의 굴’에 갇혀서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앞에서 딸랑딸랑 워낭 소리가 들렸다. 소달구지임에 틀림없다. 따뜻한 눈물이 볼을 데웠다. 비로소 마음속의 ‘여우굴’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형태의 ‘여우굴’을 마음에 만들어 놓고 살고 있을까? 있던 굴도 헐어야 할 판에 스스로 굴을 여기 저기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빠져서 헤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두려움에 빠지면 삶은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이제 모든 굴을 훌훌 헐어버리고 두 눈을 부라리며 자신 있게 삶을 살아가자.
이정희 시인·프리랜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우병택 2021-11-05 06:19:33
그러게 말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헛걱정이 차지하는 비율이 8할이란 말이 있습니다. 돌아보면 그래도
그런 헛걱정이 있었기에 삶의 활력소도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