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폐허의 계절 나를 위한 변명
[경일춘추]폐허의 계절 나를 위한 변명
  • 경남일보
  • 승인 2021.12.05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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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희 (수필가·진주문인협회)
 



감정의 체위가 현란하던 시절, 여자는 전혜린처럼 서른이 되기 전에 죽어야 가치 있는 여자이고 서른이 넘어 사는 여자는 잉여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타너스만 봐도 그녀가 걷던 뮌헨의 거리를 떠올리고 두 갈래 길 앞에선 프루스트의 길을 상상하며 살던 때였다. 서른이 되어도 죽지 못한 나는 사십에 글쓰기 시작하여 문단 거목이 된 박완서처럼 사는 여자도 있다며 생명유예기간을 늘였다. 생활적 욕지기를 샤르트르의 구토라 여기며 죽을힘을 다해 오늘을 막았다.

데카르트에 관한 방법서설에 관한 논문을 쓴 것도 이유를 대며 사는 나 자신에 대해 방법적 회의를 하며 확인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전혜린처럼 자살을 하지 못했으니 늦잠을 교집합으로 삼아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새벽 5시부터 철학을 가르치다 찬 기운이 몸에 맞지 않아 폐렴에 걸려 죽은 데카르트처럼 나도 죽으리라. 위가 안 좋은 나는 위통인 지병이 악화되어 죽은 일본 국민작가 나스메소세끼처럼 죽으리라. 어른이 되면 소설가 김동인, 이한직 시인처럼 밥값 술값은 늘 책임지는 사람으로 살리라. 나날이 고르지 못한 생각이었으므로 행동도 올바르지 못했다. 아는 게 힘이 되지 못하고 병이 되던 시절이었다.

어쭙잖은 지식을 생색내고, 재사용하며 사는 나 자신에게 넌더리가 나던 어느 날, 감정의 폐허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나는 고요했고 적요했다. 그저 이것저것 분별없이 읽었다. 그러다 읽는 것 또한 멈추고 살았다. 한참 후 폐허가 된 감정에 새 싹이 돋아났다. 비로소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조르바, 저 사람은 안나, 저 사람은 몽테뉴…. 내 이웃 모두가 소설 속 인물이고 철학자고 시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이데거를 몰라도 존재의 의미를 더 잘 알고 밀란 쿤테라를 몰라도 참을 수 있는 무거움으로 생을 살아내고 있었다. 모두가 평범함 속에 위대함을 숨겨 놓고 숨바꼭질을 하며 살고 있다. 계속 나만 술래다.

호떡집 아줌마에게도 스토아철학이 있고 옷가게 사장님도 김승희 같은 시를 쓰고 있었다. 오늘도 철학자에게 호떡을 사먹고 시인에게 따뜻한 조끼를 사 입는다. 조르바도 만나고 칸트도 만났는데 아직 ‘달과 육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를 만나지 못했다. 언젠가 만나겠지. 두렵고도 행복한 설렘이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영감 같은 내 아버지의 삶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겨울은 계절의 폐허고 부모와의 이별은 영혼의 폐허다. 모든 게 안으로 스며드는 늦가을, 간헐적 단식처럼 간헐적 감정의 폐허를 만들어 봐도 좋은 계절이다.

민경희 수필가·진주문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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