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 이학박사)
함안 어속치(漁束峙)는 높고 험해 눈이 오면 얼음고개가 됐다. 가마꾼들은 비틀거리기가 일쑤였고 많은 이들이 미끄러져 해를 입지 않기위해 손발로 엉금엉금 기어 넘었다.
1890년 1월, 진주목 함안 군수 오횡묵(吳宖默)은 어속치를 넘어 진주성에 도착했다. 경상우병영은 14개 속현의 군사체계를 관할하는 기관으로 군력이 막강했다. 설날이면 속현의 수령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젊은 병마절도사에게 세배 드리고 문안했다.
진주성 병영에서는 큰 저녁 상이 차려졌지만, 박규희(1840~?) 병마절도사는 오히려 민망해 한다.
“주방에 명하여 찬을 더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빈객은 극구 사양한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밥상을 앞에 두고도 “차린 것이 변변치 않다”고 한 것은 유교의 예절탓이다.
이웃 고을 수령이 꽃에 비유한 교방음식은 맵고 짜지 않은 서울풍이 가미됐다.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입맛에 맞춘 것이다. 여기에는 진주기생들의 솜씨도 한몫했다. 오횡묵의 일기에는 기생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영문(진주성 병마절도영)에서 저녁식사를 성대히 장만했고 송절과 월매가 석반을 차렸다’고 쓴 내용이다.
1889년 5월 29일 ‘진주방문기’에는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송절과 월매의 처소에서 산해진미를 마련해 왔다는 사실도 기록돼 있다. 오 군수는 진주 교방 ‘백화원’에서 춤 연습을 하는 어린 기생들이 안쓰러워 돈 10냥을 주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땔감이 귀했다. 한양에서는 땔감을 구하지 못 한 백성들이 몰래 왕릉의 나무를 도벌하다 처형되기도 했다. 반면 19세기 말부터 1942년까지에 진주의 나무전은 명물거리였다. 인근 산골에서 밤새 걸어 새벽에 나무를 팔아 생필품을 교환했다. 산해진미의 교방음식이 탕 찜 구이 등 다양한 형태로 발달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풍족한 땔감 덕분이었다. 진주 교방음식이 차별화되는 또 한 가지 이유다.
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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