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큰 공약’에 유권자 관심 적어 그나마 다행
[경일시론]‘큰 공약’에 유권자 관심 적어 그나마 다행
  • 경남일보
  • 승인 2022.02.2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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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 (논설위원)
방목장에는 소를 한 마리라도 더 풀어놓는 사람이 이득이다. 따라서 풀 뜯는 소는 경쟁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목장은 재빨리 황폐화하고 만다. 산업혁명 무렵 영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이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는 생물학자 가렛 하딘이었다. 그는 1968년 논문에서 ‘구명선에서의 생존’을 예로 들었다. 열 명 분 식량만 싣고 열 명이 탄 구명선에 누군가 타려고 할 때, 그를 돕는 건 구명선 자체를 위협한다는 우화였다. 무책임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걸 말한 거다.

봄꽃처럼 만발한 대선 공약들을 보면서 공유지의 비극을 생각한다. 우선 큰 경제 공약들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국민기본소득을 간판 공약으로 했던 여당 후보는 국정 공약 270여 개를 내걸고 있다. 임기 5년간 300조원 이상이 들어간다. 이에 대해 한 경쟁자는 1300조 원도 더 들 것 같더라고 주장했다(21밤 TV토론). 군의 사병 월급을 200만원으로 올리겠다는 야당 유력후보의 공약은 모두 200여 개. 여기에는 266조원이 들어간다. 또 다른 야권후보 역시 100개 공약에 5년간 201조원을 부어야 된단다. 한국메니페스토실천본부가 각 후보 답변을 근거로 취합한 결과다.

300조원이나 200조원은 얼마만 한 돈일까. 올해 정부 당초예산이 604조원이란 사실에 비춰보면 감이 잡힌다. 나라 전체의 살림살이에 쓰는 돈의 1할을 공약사업에 쏟는다는 거다.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나올까. 후보들은 세출예산 절감과 추가 세입증가란 말로 얼버무린다. 쓰게 돼 있는 예산, 들어가야 할 예산을 깎아 아끼고 세금과 세외수입 더 늘리겠다는 거다.

하지만 지금껏 주던 공무원 월급이나 연금을 깎을까. 교통범칙금을 왕창 많이 걷나. 관공서 인지대를 인상할까. 아닐 것이다. 대부분은 세금 더 걷기에 기댈 거다. 세율을 높이든지, 작년처럼 부동산 거래·보유세를 대폭 올리는 길이 있다. 그런데도 ‘공약은 먼저 내놓는 이가 임자’라는 듯하다. 공유지에 소 몰아넣듯 그야말로 양껏 내지르고 보자는 걸까.

공유지의 비극을 피하는 여러 방안들이 제시됐지만 농부들의 이기심 억제가 근원적 해결책이다. 병사들이 그동안 월급 올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던가. 기본소득도 그렇다. 이는 15세기 영국 소설 ‘유토피아’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모든 국민에게 빈곤선 이상으로 살 만한 생계비를 똑같이 지급한다는 거다. 후보는 투기소득에 대한 세율 인상, 중과세 등이 재원이란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그 원래 어원처럼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냥 상상의 이상향일 뿐이란 건 세계 국가들의 대체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미국 알래스카 주처럼 천연자원으로 국고를 채우는 나라가 아니다. 아니면서 기본소득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겠나.

이런 사정을 알아서일까. 유권자들은 공약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는다. 자영업자 빚을 탕감해준다고도 하고 집 많이 가진 이들의 양도세를 대폭 낮춰 준다고도 한다. 그런데도 여론조사를 보면 민심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공약에 표 찍겠다는 사람이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 거다. 오히려 유권자들은 정권재창출 아니면 정권교체 둘 중 하나에 마음이 가 있다. 경험칙상 빌 공(空)자 공약이라 싶어서일까. 차라리 정권유지냐 교체냐만 생각하는 게 속 편한 건지도 모른다.

유권자들이 공약에 큰 기대 안 걸고 멀뚱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 싶다. 이것은 마치 국가공동체라는 방목장을 길이 유지하기 위해 정치인이라는 부류의 농부 아닌, 선량한 소들이 되레 방목장 훼손을 걱정하는 부조리극 같아서 감동마저 살짝 느낀다. 외치는 경제 공약, 복지 공약보다는 그것에 환호하지 않는 민초의 분별력이 훨씬 돋보이는 거다. 정권 심판이냐 안정이냐. 그것에 열중하는 국민의 공동체적 가치관이 공약보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대선 밑이다.
 
정재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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