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 (70) 그녀의 편지 (전성호)
강재남의 포엠산책 (70) 그녀의 편지 (전성호)
  • 경남일보
  • 승인 2022.02.2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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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다, 눈이 내린다

그녀는 눈을 보면 강아지처럼 콩콩 뛰었다

손바닥 눈을 비볐다가 냄새를 맡는다

아이들처럼 즐기곤 하였다

우리가 처음 만날 때 내린 첫눈이 도심을

열 번 넘게 찾아와 덮어버려도

생생한 연애는 살아나고

오늘 첫눈 퍼붓는 모스끄바

푸들대는 눈, 나는 똑같이 으르다가

네 체온만큼 녹고 있다

그때 눈 변한 것 없는데

내 곁 콩콩 뛰는 강아지가 없다

갑자기 햇살 내리꽂히는 칼날 선명한 곳

번쩍이는 하얀 섬광은 신의 눈빛인가

눈밭을 밀어내는 발자국

나는 그녀의 온화한 지상을 걸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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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에요. 말이 발화되는 순간 낭만이 흐릅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꽃눈이 만발해요. 눈은 푸들대고 그녀는 콩콩 뜁니다. 강아지도 한몫 거드는군요. 모든 사랑이 기쁘고 설레고 그리하여 이날만큼은 모두가 첫사랑인 겁니다. 하지만 화자의 설렘에는 부재가 혼재해요. 모든 사랑을 옹호하던 너와 나를 생목을 깎아내는 기억으로 떠올리네요. 그럼에도 이국에서 보는 강설은 경쾌하면서 가볍습니다. 손에 닿으면 녹아버리고 달아나버리는 눈은 사람이었다가 사랑이었다가 정지된 시간 속에 있어도 말입니다. 동토의 땅 모스크바에 첫눈이 내리고 눈 속에 사랑이 있는 건 신이 내린 섬광일까요. 사랑이 눈처럼 녹아버려도 심었다가 뽑았다가 가지치기를 했다가 마침내 떠나도 좋을 일을 생각합니다. 마침내 사랑은 혼자 남는 데 익숙한 것이 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생생한 사랑의 감정에 심장이 베여도 상관없이요. 첫눈을 맞던 따뜻한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요. 날카로운 햇발에 눈이 녹고 그녀도 녹아버린 것일까요. 눈밭을 밀어내는 발자국을 누르며 걷습니다. 신의 눈빛이 있는 곳으로 걷다 보면 무거운 내 발자국은 햇빛이 덜어주겠지요. 그리고 나는 온화한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면 될 일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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