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집무실 진통은 ‘혁신 과일’ 위한 대가
[경일시론]집무실 진통은 ‘혁신 과일’ 위한 대가
  • 경남일보
  • 승인 2022.03.2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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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 (논설위원)
‘선친께서 생전 과일나무 접붙이기를 잘한다는 전(田)씨에게 일을 시킨 적이 있다. 그는 뜨락의 품종 안좋은 배나무 밑둥을 톱으로 사정없이 베었다. 그리고는 상품종 배나무 가지 끝을 구해와 베어낸 그루터기에 틈을 벌려 끼워넣고 끈적한 흙으로 봉했다. 지켜보며 망령되고 허랑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지나 싹이 돋아나도 환영(幻影)을 보는 듯 괴이쩍기만 했다. 뒷날 나무가 무성해지고 배가 열려서야 그 끝이 진실임을 믿게 되었다.’ 이규보의 ‘접과기(接果記;과일나무 접붙인 이야기)’ 일부다. 고려 때 이미 과일나무를 접붙였다는 게 놀랍거니와 이 글 찾아 다시 읽은 건 마침 나무 접붙이는 시기라서가 아니다. 문득 대통령 집무실 이전 논란과 오버랩되는 바가 있던 거다.

윤석열 20대 대통령 당선자가 청와대엔 임기 첫날부터 들지 않겠다며 집무실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공약이었다. 주지하듯 이 공약의 의도는 국민과의 소통이며,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 구조의 혁파다. 여기엔 철통같은 청와대 경호의 담벼락에 갇히는 순간 전임자들처럼 제왕적 대통령의 모습에서 한발짝도 탈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 공약은 윤 당선인이 처음 내건 게 아니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도 가졌던 마음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두 번의 대선 후보 시절 듣기 좋게 내걸었던 공약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못 이룬 국민의 꿈이었다. 한데 윤 당선인이 단단한 각오로 달려들고 있는 중이다.

생각해보면 당선증을 받은 날로부터 50일 남짓 만에 추진하기엔 매우 힘든 과업이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대통령의 새 집무실 마련하는 일이 민주당 어느 의원 말마따나 ‘어린애 장난’처럼 만만하겠는가. 이사의 어마어마한 업무량과 주어진 시간, 약방 감초보다 더 감초 같은 경호 우선의 논리, 관련 국가 시설의 연쇄 이전에 따른 안보상의 문제점, 과다한 국민의 혈세…. 부당하다 할 만한 이유는 흔한 말뽄새로 그야말로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윤 당선인은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멀쩡한 청와대를 두고 가설무대 같은 인수위 사무실에서 대통령 업무를 시작한다? 청와대를 하루아침에 국민의 공원으로 만든다? 마치 옛글 속의 접붙이기 전문가가 배나무 밑둥을 과감하게 잘라버린 것과도 같다. 언뜻 보기에 망령되고 허황스러울 법하다.

문 대통령은 윤 당선인의 집무실 용산 이전 의지에 반대 입장이었다. 안보 때문이라 했다. 인수위 측에서는 안보상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하지만 문제가 왜 없겠느냐는 군사전문가들의 반박도 만만찮다. 그러자 한쪽에선 자기네가 못 이룬 회한에 콤플렉스라도 느끼는 거냐고 한다. 다가오는 6월 지방선거 밑의 지지층 결속 전략이라고도 한다. 이런 양측 주장을 두고 국민들은 그 진실을 알 리가 없다. 언론 논조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그저 깜냥껏 생각만 해볼 뿐이다.

옛글 속 접붙이기 전문가는 기존 배나무 밑둥을 단호히 잘랐다. 허랑하고 망령되다는 타인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지식과 방식대로 했다. 윤 당선인의 집무실 이전도 이 사람의 톱질과 비슷하다. 오래토록 알고도 못 고친 관행적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과감하고도 기발한 모험이 필요하다. 진통도 겪어야 한다. 이는 ‘혁신 과일’을 얻기 위한 대가이리라.

청와대와 민주당에서는 이전 비용이 1조원 넘게 든다고 한다. 윤 당선인은 500억원이면 된다고 맞선다. 어느쪽이 진실에 가까운지 다수 국민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탈권위와 소통, 청와대의 쾌적한 공간을 국민들이 누리게 된다면 그 공익적 가치가 얼마이겠나. 돈으로 환산할 수 없게 클 것이다. 처음엔 망령되다 싶어도 나중에 얻게 될 열매가 참으로 이러하다면 그 대가는 기꺼이 치러볼 만하리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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