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묵정밭을 정리하며
[경일춘추]묵정밭을 정리하며
  • 경남일보
  • 승인 2022.05.1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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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수필가)
이덕대


자연의 회복력은 신비하다.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는 자연의 치유력을 보면 섬뜩하리만치 느낄 수 있다. 고추를 심고 들깨를 뿌렸던 밭이 그냥 버려진지 겨우 한해다. 그 사이 굵은 대나무들이 죽림을 이루고 도꼬마리나 도깨비바늘 같은 잡초가 사람 키보다 더 자라 불과 얼마 전에 채전으로 일구던 곳이라 상상조차하기 어렵다. 사람 살던 흔적이 사라지긴 순식간이다. 망가지고 훼손된 상처를 복구하는 자연의 힘은 놀랄 정도다.

어느덧 완연한 여름이다. 짙은 초록의 여름은 산자락이든 개울가든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거침도 빈틈도 없이 온다. 주인 없는 밭에도 여름 볕은 풍성하다. 밭둑 매실나무에는 버려진 열매가 노랗게 익어 매달렸다. 무성한 잎을 피운 덩굴식물이 가지마다 배배 감고 올라가 주인 손길 없는 나무의 아픔이 느껴진다. 가꿀 수 없으면 애당초 심지 말았어야 했다. 인간의 손길에 의해 심겨지고 자란 것들은 야생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 있으랴. 애달프고 처연한 마음이 되어 가녀린 손으로 매실나무를 쓰다듬으며 감은 덩굴들을 걷어 낸다. 바지가랑에는 기회를 엿보던 도둑가시들이 이때다 하고 잔뜩 달라붙는다. 심은 지 오래된 감나무도 형색 초라하긴 마찬가지다. 푸릇푸릇 연초록 잎을 단 가지는 혼자 열렸다가 그대로 말라버린 작년 감 몇 개가 아직도 매달려 있다. 병충해를 떨구어낼 약 바람 한번 못 쐬었을 것이니 부실한 감 몇 개를 매달고 병든 잎사귀들과 오가는 산객들 사이에 혹 주인이라도 있을까하며 얼마나 목이 빠졌을까. 잡초가 무성한 나무 아래는 벌써 무당거미가 우중충 그물을 치고 있다. 이대로 둘 수가 없다. 한두 해만 더 방치하면 고라니가 새끼를 낳고 길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다. 멀쩡한 밭을 잡초에게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산을 개간하고 돌덩이를 헤쳐 가며 논밭을 일구던 옛사람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이건 죄악이다. 하지만 힘든 육체노동에는 도대체 손방이니 이를 어쩌랴. 산마루 넘어오는 햇살과 바람만 망연히 느껴볼 뿐이다.

거침없이 자란 나무와 풀들을 낫으로 베고 괭이로 땅을 일구어 다시 밭으로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부랴부랴 고향 선배에게 연락을 하여 그의 도움으로 어렵게 묵정밭을 정리했다. 트랙터로 몇 번을 작업 한 끝에 풋풋한 땅이 드러났다. 온전한 밭이 되려면 더 많은 손길이 필요하겠지만 이만해도 매실나무 감나무에게 미안함이 조금 덜해진다.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어찌 시골의 묵정밭뿐이랴. 코로나 우환도 걷히고 새로운 정권도 들어섰으니 가치 없다고 오래토록 버려진 것들에게도 따사로운 보살핌의 손길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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