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경남의 역사, 사천 선진리왜성 전투[1]
다시 보는 경남의 역사, 사천 선진리왜성 전투[1]
  • 임명진
  • 승인 2022.06.16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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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쟁 최후의 반격, 사로병진 작전

우리 역사에는 ‘만약에’ 라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사건들이 있다. 사천 선진리왜성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조선과 중국, 일본, 3국의 군대가 전투를 벌인 격전지다. 그 전투가 미친 여파는 실로 엄청났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7년 전쟁의 마지막 양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하지만 이 전투를 제대로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에 본보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당시의 전투를 다시 한 번 새롭게 조명해 보는 지면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사천선진리왜성 항공사진. 자료제공=국립진주박물관
[1] 7년 전쟁 최후의 작전, 사로병진
[2] 최대 격전지, 사천 선진리왜성
[3] 순천왜성과 이순신 장군
[4] 왜성에서 공원으로
[5] 전문가 인터뷰

◇조선 침략한 일본, 남해안에 왜성을 쌓다

1592년 4월 14일 일본은 15만의 병력을 동원해 조선을 침략했다. 부산에 상륙한 지 한 달여 만에 서울과 평양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기세를 올렸다. 준비 없이 전쟁을 맞은 조선군은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펼쳤지만 막지 못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내몰렸던 조선은 11월 9일 진주성에서 승전보를 전하면서 반전을 꾀했다. 때마침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과 해상에서 이순신 장군의 활약이 이어졌다.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이듬해 1월에는 평양성 탈환에 성공했다. 2월에는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며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수세에 몰린 일본은 부산을 본거지로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고 주둔하며 조·명연합군과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조선 남부를 할양하라는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협상은 진척되지 않았다.

5년여 간의 협상이 결국 무위로 끝나고 일본은 정유년인 1597년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7월 14일 칠천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은 서울로 북상하다 9월 7일 지금의 충청도 천안 근처 직산에서 명군에게 저지당했다. 바다에서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복귀한 조선 수군에게 명량에서 대패를 당했다.

그렇게 일본은 다시 남해안으로 후퇴하며 전남 순천에서 울산까지 약 600㎞에 걸쳐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31개의 왜성이 축조됐으며 그 중 17개가 경남의 해안가에 집중됐다.

사천 선진리왜성(이하 사천왜성)은 바로 그 시점에 지어졌다.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로 축조한 사천왜성은 핵심 방어거점의 하나였다.

부산 방면에서 전라도로 가기 위해서는 진주는 반드시 거쳐야 했는데 그 진주의 관문이 바로 사천이었고, 남해안의 해상 교통 요충지로도 사천은 매우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사천은 일본과의 7년 전쟁 동안 바다와 육상에서 각각 한 번씩의 대규모 전투를 치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투입한 사천해전이 있었고, 정유재란 때는 사천왜성(1598년) 전투가 벌어졌다.

 
일제강점기 시절 사천 선진리성 부근 전경. 자료제공=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시절 사천 선진리성 원경. 자료제공=국립중앙박물관.
◇조명연합군 최후의 반격 ‘사로병진’

정유년에 시작된 일본의 대공세를 저지한 조·명연합군은 곧바로 반격을 가했지만 난관에 봉착했다. 대표적인 전투가 1598년 1월에 치른 1차 울산왜성 전투다. 일본의 제2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한 울산왜성 공략을 위해 조·명연합군은 5만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상훈 육군박물관 부관장은 “일본군은 남해안의 순천에서 울산까지 장사진처럼 일자형으로 된 방어진형을 꾸렸다”면서 “마치 뱀처럼 머리가 공격을 받으면 꼬리 쪽에서 와서 도와주고, 중간이 공격을 받으면 꼬리와 머리가 도와주고, 이런 식으로 서로 연계해 응원했다”고 설명했다.

울산왜성의 일본군은 식수와 식량까지 떨어졌지만 남해안 일대의 일본군이 끊임없이 지원을 보내면서 결국은 조·명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 부관장은 “심혈을 기울인 울산왜성 전투가 실패로 끝나면서 조·명연합군은 대부대를 동원해 적의 거점, 한 곳을 집중 타격하는 것 보다는 동시에 주요 거점을 공격해 서로 응원하지 못하게 하는 작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고 했다.

그렇게 1598년 2월부터 새로운 작전이 수립된다. 타격 목표는 적의 주요 지휘부가 주둔하고 있던 울산왜성, 사천왜성, 순천왜성 등 3곳이 선정됐다. 수군도 해상에서 압박과 적의 지원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육상 3곳과 해상 1곳 등 총 4개 방면에서 일제히 공격한다는 뜻에서 ‘사로병진’이라고 한다.

◇반년 넘게 작전 준비…사로군 부대 편성

사로병진에 투입된 조·명연합군은 동쪽에 있는 울산왜성을 공격하는 동로군, 서쪽에 위치한 순천왜성을 공격하는 서로군, 가운데 위치한 사천왜성을 공격하는 중로군으로 편제했다. 동로군은 명나라는 마귀, 조선은 김응서와 선거이 장군을, 서로군에는 명나라는 유정 장군을, 조선군은 권율 장군, 중로군에는 명나라는 동일원 장군을, 조선군은 경상우병사였던 정기룡 장군을 배치했다. 바다의 수로군에는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과 명의 진린 제독이 가세했다.

선조실록 31년 10월 12일자 기록을 보면, 사로병진작전에 참가한 조·명연합군의 전체 병력은 11만 3085명으로 명군이 9만 2100명, 조선군 2만 985명이다. △동로군은 명군 2만 4000여 명, 조선군 5511명 등 총 2만 9514명 △중로군은 명군 2만 6800여 명, 조선군 2215명 등 총 2만 9015명 △서로군은 명군 2만 1900명, 조선군 5928명 등 총 2만 7828명 △수로군은 명군 1만 9400여 명, 조선군 7328명 등 총 2만 6728명으로 적고 있다.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연구위원은 “사로병진 작전은 7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반격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길어진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은 명의 의지가 크게 작용해 사실상 명군이 주도했다. 실제 참여한 군사의 규모를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사천왜성에는 ‘시마즈 요시히로’라는 일본군 장수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휘하에는 1만 5000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봉대 제4군 선봉장으로 파병됐다. 1593년 6월에는 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고 7월에는 거제도의 영등포왜성에 주둔했다. 이후 가덕도의 가덕왜성으로 옮겼다가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전라도의 남원과 부여 등을 공략하다 사천에 왜성을 쌓고 주둔했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당시 주요 사건 순

-1592년 4월14일 일본, 조선 침략

-1592년 5월29일 사천해전

-1593~1597년 강화협상

-1597년 7월15일 칠천량 해전

-1597년 9월7일 직산전투

-1597년 9월16일 명량해전

-1597년 12월21일~1598년 1월2일 1차 울산성 전투

-1598년 2~8월 사로병진 작전 준비

-1598년 10월 1일 사천왜성 전투

-1598년 10월 18~19일 노량해전

 
이효종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이효종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천은 사로병진 작전의 핵심”



이효종 학예연구사는 “임진왜란은 일본군이 수도 서울로 진격하는 선의 지배라고 한다면 정유재란은 점령지를 확대해 나가는 면의 지배를 하려고 했다”고 정의했다.

조·명연합군에 밀린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수십여 개의 왜성을 쌓고 장기주둔에 들어갔는데, 이 학예연구사는 “그 주력은 울산왜성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 사천왜성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 부산에 주둔한 본대 병력으로 나뉜다”고 했다.

사로병진 작전은 바로 이 주력 거점을 일거에 깨트리는 작전이라고 설명했다. 이 학예연구사는 “동원된 병력 규모만 보면 사천왜성 보다는 순천왜성과 부산 본진과 가까운 울산왜성”이라고 했다. 순천왜성의 경우 육로와 바다에서 동시에 압박을 가했고, 울산왜성의 경우는 2번에 걸쳐 공격을 한 것에서 알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천왜성은 바로 이 두 성을 잇는 요충지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다고 했다. 적이 서로 구원하지 못하도록 연결로를 차단하는 사로병진 작전의 핵심은 바로 사천왜성이라는 것이다.

이 학예연구사는 “순천왜성 전투가 끝나고 고니시가 퇴각을 할 때 도움을 준 부대가 바로 사천에 있던 시마즈의 부대라는 점에서 조·명연합군이 왜 사천왜성을 공격하면서 연결로를 끊으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r



 
국립진주박물관 이효종 학예사가 사천왜성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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