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27)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27)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7.1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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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이양하, 이 두 분의 수필은 대체로 자신의 의식 세계로 세상일을 데려와서 살펴 사색하고 예지로 재단합니다. 찌르는 맛이 있지요. 때로는 관념을 빌려 쓰기도 하구요. 논리에 맞게 자기 사상을 시원하게 펼칩니다. 직관스러운 이런 표현을 나는 언어의 직선미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하면 피천득 선생의 수필은 곡선미라 할 수 있습니다. 관념어는 안 쓰다시피 자린고비 짓을 합니다. 사상이라는 것도 거의 나타내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이렇다 하는 일들에도 관심 없어 보입니다. 세상일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정신이 어찌 없었겠습니까마는 일상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를 노래하는 거지요. 선생의 서사는 서정을 품고 있어서 살이에서 보이는 감정을 친근하게 표현합니다. 입에 침이 고이는 정조와 아름다운 심상을 섬세한 문체로 곱게 씁니다. 쏘문 체로 친 밀가루같이. 산문으로 써진 서정시라 할까요? 그래서 사색이 아니라 읽는 이에게도 명상을 선물합니다.

이런 점을 들어 현실도피라느니, 이 나라 수필을 신변잡기로 떨어뜨렸다느니, 입방아를 찧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만, 그런 태도는 그 시대를 살아내지 못한 우리들의 이해 부족이라 여깁니다. ‘그랬다’에 비해서 ‘그럴 것이다’라거나 ‘그랬을 것이다’는 진실의 순도지수가 말도 못 하게 낮은 거니까요.

“지용이 시를 못 쓴다고 가엾이 여겨주는 사람은 인정이 고운 사람이라 이런 친구와는 술이 생기면 조용 조용히 안주 삼아 울 수가 있다.” 이렇게 시작되는 정지용 선생의 ‘산문’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시와 문학에 생활이 있고 근로가 있고 비판이 있고 투쟁과 적발이 있는 것이 그것이 옳은 예술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가 흘러나왔는지. 여기에 그 시대를 살았던 시인의 고뇌가 있습니다.

“국토와 인민에 흥미가 없는 문학을 순수하다고 하는 것이냐? 남들이 나를 부르기를 순수시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스스로 순수시인이라고 의식하고 표명한 적이 없다.(…)일본 놈이 무서워서 산으로 바다로 회피하여 시를 썼다. 그런 것이 지금 와서 순수시인의 소리를 듣게 된 내력이다.”

피천득 선생도 ‘도산’에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생님 장례에도 참례치 못하였다. 일경의 감시가 무서웠던 것이다.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베드로보다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는 ‘도산 선생께’에서는 죄스러운 심정을 고백합니다.

“선생이 순국하신 후 아깝게도 일제 탄압을 대항하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나무들이 있었습니다.(…)저 같은 땔나무감밖에 되지 못하는 것은 치욕을 겪으면서 명맥을 부지했습니다.(…)선생은 상해 망명 시절에 작은 뜰에 꽃을 심으시고 이웃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주셨습니다. 저는 그 자연스러운 인간미를 찬양합니다.”

몸담았던 시대가 의지를 가난하게 하여 어쩔 수 없이 순수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면 우리는 그걸 시대정신의 다른 표현이라고 인정해야겠지요. 내가 쓰는 가냘픈 이야기들이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위로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정지용의 ‘향수’처럼 세상에서 살짝 밀쳐져 있는 자잘한 것들을, 금아가 소박한 언어로 담아낸 섬세한 일상의 풍경을, 우리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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