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36)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36)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9.1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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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여름이 설핏해졌습니다. 덥다고, 가문다고 야단하다가 이번에는 강한(?) 비가 와서 가난한 사람들 물 폭탄을 맞았다고, 반지하 방이 아닌 높은 데 사는 분들이 비를 탓하면서 한 십 년 시묘살이나 할 듯이 법석을 떨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척을 좋아하는 동물이 인간이라는 말이 있어서 아는 척, 뭘 하는 척, 남을 위하는 척, 잘난 척, 아닌 척, 안 한 척, 죽는 척 그러는지, 여름 내내 이 척들 때문에 더 시끄러웠지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은 까칠한 계절로 기억될지 모릅니다. 그래도 떠나가는 내 여름을 돌아보면서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답다는 말을 기억하기로 합니다. 세상엔 진솔한 사람이 더 많으니까요.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꼭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여름은 젊음의 계절이지요. 민태원 선생은 ‘청춘’을 이렇게 ‘예찬’합니다. 우리에게 여름인 이 젊음이 없다면 어찌 풍요로운 이정(利貞)을 기대하겠습니까? 가슴설레게 하는 이 푸른 계절을 진웅기 선생은 ‘여름의 나무’로 칭송합니다.

‘(…)무성한 오리나무 숲 사이로 아카시아 나무들이 달려간다. 가파른 산을 떼지어 치달아 오른다. 꾸미지 않는 기괴한 모습들을 하고 거침없이 성큼성큼 산을 오른다. 난폭하게 손을 뻗고 넉살 좋은 얼굴로 너울거리면서 산 면을 가득 메우고 산꼭대기를 삼키고 군단처럼 함성을 지르며 다음 산으로 덤벼든다.(…)’

여름은 진저리 쳐야 하는 계절이 아니라 활기 넘치는 청춘의 계절이라는 걸, 우리는 이런 글에서 활기찬 청춘의 기를 받습니다. 비록 처서 지난날 빈 들에 참외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여린 감각이나 대창보다 얇은 감성으로 봄바람에 나부끼는 버들잎 같은 혀로는 쓸 수 없는 글이지요. 이만치 서서 오랫동안 두고두고 바라보고서야 얻을 수 있는 이야깁니다. 이게 에세이·수필이 지녀야 하는 본질일 것입니다.

민태원 선생의 청춘과 진웅기 선생의 여름 나무는 사실일까요? 정말일까요? 청춘의 피는 끓는다. 아카시아 나무들이 달려간다. 말도 아니지요. 이런 걸 허구라는 이름으로 에세이·수필은 쓰면 안 된다고 우격다짐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은 평소에 다 이런 허구한 말을 하며 삽니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어떤 말은 아름다워서 사람의 심성을 즐거움에 젖게 합니다. 아버지가 죽었다. 사실이 이런데 우리는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어디로요? 하늘로. 심지어는 소천(召天)하셨다고 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천상병 선생은 귀천(歸天)한다고 합니다. ‘인생은 고해’라는 이 세상살이를 소풍왔노라 하면서.

글지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워지려고 애를 쓰며 삽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오순도순하는 거지요. 사람살이에 꽃이 되는 이런 허구한 말들이 척 안 하는 진솔한 언어임을 기억합니다. 이 저물어가는 여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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