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고문헌 [3]한약우의 ‘평거지(平居誌)’와 평거
경남의 고문헌 [3]한약우의 ‘평거지(平居誌)’와 평거
  • 경남일보
  • 승인 2022.12.06 16: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망진산·남강 따라 평거사람들의 옛 삶이 유유히
평거동의 역사를 알려주는 ‘평거지’
문중 인물의 시문·생애 등이 담겨
역사·정체성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


◇‘평거지’ 소개와 배경

진주 최고의 주거지로 자리 잡은 진주시 평거동. 평거동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문헌은 매우 빈약하다.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에 평거동의 역사를 알려주는 고서 한 권이 소장되어 있다. 우산(愚山) 한약우(韓若愚, 1868-1911)가 엮은 ‘평거지’가 바로 그 책이다.

필자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오래전이다. 한약우의 아들이자 전 진주고 교장인 한주 선생이 1995년 고문헌 1232권을 경상대 도서관에 기증했는데, 그 중에 이 책이 포함돼 있었다. 한주 교장은 부친의 손때가 묻은 이 책을 무척 애지중지했다. 1부 복사해 도서관에 보관하고, 원본은 돌려 달라고 했다. 그 후 한주 교장은 진주를 떠나 경기도 용인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별세했다. 원본은 이제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난해 한주 교장 부인께서 아끼던 고서 128권을 추가로 기증했다. 그러나 그때도 이 책은 여전히 기증을 보류했다. 이번 경남일보 연재와 관련해 다시 아들 한봉구 씨에게 기증을 간곡히 권유하니, 이 책을 직접 들고 사무실로 찾아와서 선뜻 기증했다. 27년 만에 이 책을 다시 접하니 감회가 새롭다. 귀중한 자료를 지역민에게 소개할 기회를 주신 한약우 후손에게 감사드린다.

 
우산 한약우 초상

◇‘평거지’의 내용

우리나라는 조선 초기부터 국가 주도의 지리지 간행이 본격화됐다. 이때의 지리지 간행 목적은 국가나 관할지역의 현황을 파악해 행정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남지역에 살면서 자기가 사는 마을의 현황과 역사를 기록하고자 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자기가 사는 지역을 사랑하면 자세히 알고자 하고, 알았으면 이를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곧 한약우가 평거와 백곡마을을 사랑하여 평거지(1893년)와 ‘백곡지’(1895년)를 남겼다. 한약우가 이 책을 편찬한 것은 선조가 평거에 살았기 때문이다. 평거에 사는 청주한씨는 진주 오현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조은 한몽삼의 후손들이다. 연산군 때 진주시 이반성면 정수리로 옮겨와 살다가 병사공 한범석·유오 한기석 형제가 진주 평거로 이주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갑산 중턱에 청주한씨 문중 재실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약우는 유오 한기석의 후손이다.

한약우는 평거에 살다가 증조부 때부터 다시 산청군 단성면 백곡마을로 이주했다. 어느 날 부친이 ‘평거산수도’를 그려 와서 한약우에게 보여주었다. 한약우는 이 그림을 보자 고향이 생각나 평거지를 저술하게 된 것이다.

◇평거의 지리와 지명

‘평거지’는 오늘날의 신안동·평거동·판문동 일대의 역사와 현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는 두 장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하나는 평거동을 개관하는 ‘평거산수도’이고, 하나는 유오 한기석이 살던 ‘유오서당도’다. 이 그림을 잘 살펴보면, 진주 남강 건너편에는 망진봉-일자안-석벽-칠봉이 연결되어 있다. 망경산 이름은 망진봉(網鎭峯)·망진봉(望陳峯)·망경산(望京山)·망진산(望晉山) 등 다양한데, 이 책에서는 망진봉(網鎭峯)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망진산에서 희망교 사이 나지막한 산은 일자안(一字案)이라고 불렀는데, 산 높이가 한일자(一)와 같이 가지런하여 밥상을 차린 모양이라는 뜻이다. 희망교와 통영-대전고속도로 사이를 석벽이라 하고, 진양호까지 낙타 등처럼 일곱 봉우리가 연결된 곳은 칠봉이라 불렀다.

평거동 앞으로는 남강이 흘러가는데, 이곳은 별도로 청천강(菁川江)이라 이름했다. 남강 상류는 덕천강과 경호강에서 흘러온 물이 합류해 넓은 시내를 형성했는데, 이를 광탄(廣灘, 너우니)이라고 불렀다. 광탄은 진양호가 건설되면서 사라졌다.

신안 주공3차 아파트 인근에는 영담(靈潭)이라는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영담 근처에는 한계로가 살았던 세한정과 한기석이 도연명을 흠모하여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어놓고 살았던 유오서당이 보인다. 평거의 중앙은 조라동(助羅洞), 서쪽은 오동골(梧桐谷), 북쪽은 판문동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진주 남강 적벽을 찾아서


큰 강이 흐르면 강변의 바위는 침식작용으로 석벽이 형성된다.

평거 앞에는 맑은 청천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강변에는 높은 석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석벽은 돌벼랑이라는 뜻이지만, 이 책에서는 적벽이라 불렀다. 적벽은 석벽과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적벽은 소동파가 적벽부를 읊은 곳과 흡사한 곳을 가리킨다. 경남에는 산청 단성 적벽이 유명하다. 진주에도 적벽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한주 교장이 기증한 자료 중에서 ‘적벽범주서’라고 적힌 고문서 한 장을 찾을 수 있었다. 지은이는 ‘만곡유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만곡유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거지를 살피다가 다시 ‘적벽부’를 발견했다. 적벽부는 평거에 살던 세한정(歲寒亭) 한계로(韓啓魯, 1768-1832)가 지은 글이었다. ‘만곡유인’은 한계로의 별호였다. 한계로는 희망교와 통영-대전고속도로 사이 석벽을 적벽이라 부르며, 그 아래에서 뱃놀이를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동에서 약수암까지는 강변 보행로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가까이에서 적벽을 볼 수 있었다.

임술년(1802년) 7월 기망일(16일) 산청 단성에 사는 이백문이 한계로를 찾아와 함께 뱃놀이를 청했다. 소동파가 적벽에서 배를 타고 달빛을 감상한 흥취를 만끽하기 위해 이들은 적벽 아래로 뱃놀이를 나갔다. 들판의 이슬은 깨끗하고 강바람은 서늘했다. 밝은 달이 바야흐로 망진산 위에 둥실 떠 올랐다. 배를 띄워 청천강을 거슬러 올라가니 잠자는 기러기와 놀던 고기는 놀라거나 달아나지도 않았다. 광탄의 고기잡이 불빛과 칠봉산에서 들려오는 맑은 종소리로 인해 적벽 아래는 인간 세상이 아닌 듯하였다. 객이 나(한계로)에게 노래 한 곡을 청했다. 내가 노래하기를 ‘가을 달밤 강물은 맑고, 하늘에 둥실 뜬 달은 꽃과 같네. 이 좋은 밤 어찌 이같이 좋은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읊었다. 뱃놀이에 심취하여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듯 들판의 닭은 이미 세 번 울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진주성도를 살펴보면 촉석루에서 칠봉 아래까지 낚시하고, 뱃놀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계로의 적벽부를 살펴보면 당시 평거 청천강 적벽 아래 뱃놀이는 흔한 일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강유등축제 때 촉석루와 소망진산 사이를 운행하는 유람선을 본 적이 있다. 보름달이 둥실 뜬 밤, 저 배를 타고 좋은 사람과 적벽 아래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문득 솟아올랐다.

◇평거극담 속 평거 이야기

이 책에는 ‘평거극담’이 등장한다. 극담은 인물의 일화를 중심으로 엮은 야담집이다.

평거극담에는 평거에 전해오는 인물의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강여평이 아랫도리가 마비되는 병을 얻자 아우 강언평이 형을 업고 산사에 가서 온갖 처방으로 병을 치료했다. 밤낮으로 곁에서 간호하며 대들보에 밧줄을 매달아 잡고서 걸음을 익히게 했다. 몇 개월이 지난 뒤 병세가 조금씩 나아지자 동생은 잠시 집으로 돌아갔다. 형은 그 틈을 타서 밥 짓는 여종을 희롱하다가 영영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동생이 돌아와서 살피고는 통곡하여 말하기를 “나는 선조를 모신 사당 앞에 가서 형의 볼기를 치고 싶소”라고 했다. 훗날 형이 죽자 동생은 상복을 입고 형의 여막을 지켰다. 아침저녁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음식 올리기를 부모처럼 한결같이 했다. 1년이 지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강여평·강언평 형제의 각별한 우애 이야기는 ‘진양지’에도 수록되어 있으나 매우 간략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조선시대 하반신 마비자 재활치료 모습과 강여평이 여종을 희롱하다가 하반신 마비가 된 것을 더욱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평거지의 가치

한약우는 정제용, 하우식 등과 남명 선생이 노닐던 산청 백운동에 백운정사를 건립하는 등 활발한 학술 활동과 남명 선양 사업을 추진한 인물이다. 그러나 1900년대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 되자 더는 활동을 하지 않고 절필했다. 울분 속에 세월을 보내다가 1911년 44세의 비교적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한약우는 개인 문집 외 평거지, 백곡지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문집 외에는 모두 미간행 원고본 형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자료가 대학에 기증돼 우리 지역을 연구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이 책은 평거 마을지라고 할 수 있지만, 체제와 내용이 부실하다. 주로 평거에 살다간 청주한씨 문중 관련 인물의 시문, 생애와 산천, 유적, 지명 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평거지역의 역사를 고증할 만한 문헌이 없는 현실에서 이 책은 평거의 역사와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정희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학예연구사

평거지(한봉구 기증)
평거지에 수록된평거산수도와 유오서당도
한계로의 적벽범주서
평거에서 바라본 진주 적벽 전경
진주성도 중 평거의 뱃놀이 모습(부산시립박물관 소장)
망진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평거 전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3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