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책방지기 전직 대통령과 노시인
[기고]책방지기 전직 대통령과 노시인
  • 경남일보
  • 승인 2023.01.1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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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민우 (진주시 상평동)
 
 

15년도 지난 것 같다. 충북 단양의 시골을 네비게이션과 씨름해가며 찾아간 새한서점. 쓰러질 듯한 서가엔 천장부터 바닥까지 책이 빼곡했다. 몸이라도 잘 못 돌렸다간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바닥에 책들은 습기를 머금어 세월만큼 얼룩덜룩 삭아들어가고 있었다. 건물과 건물을 이어붙인 책장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친구와 둘이서 한참이나 둘러보다 한권씩 원하던 책을 발굴해 소소한 금액을 치르고 다시 구불구불한 길을 되돌아 왔던 기억이 있다.

독서광의 토굴같은 이 서점은 이후 영화 ‘내부자들’에서 주인공을 맡은 조승우의 시골집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수염이 비져나오는 백발이 성성한 부친역의 남일우 배우가 검사아들을 타박하는 역할로 등장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사저가 있는 양산 평산마을에 책방을 내겠다고 한 것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잔소리 일색인 몇몇 언론들의 모습은 화제라기 보다는 저격에 가까운 것 같다. ‘잊혀진다더니 왜 안 잊혀지냐’고 어깃장이 한창이다. 문 전 대통령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으로 익히 이름 나 있었다. 퇴임 후에는 부쩍 책사랑을 드러내기도 했다. SNS를 통한 책 소개는 유명인들의 ‘완판’ 물품들처럼 도서시장에 반짝 햇살을 비추기도 했다. 책 추천이 어찌나 솔깃하던지 나 역시도 800페이지에 달하는 책 한 권을 주문해 받아놓고 애독가 기분을 내고 있던 참이다.

책이 무슨 잘못인가. 서울의 대형서점인 교보문고엔 문 전 대통령이 추천한 책이라고 진열대까지 마련해놓고 버젓히 홍보도 한다고 한다. 그러니 책이 무슨 잘 못인가. 전직 대통령과 사람들이 모여들게 될 책방을 두루두루 정치적 얽어서 불편한 해석을 지어내는 탓이다. 임기 말까지 40%의 지지도를 누린 전직 대통령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또한 무슨 잘못일까.

봉하로 내려갔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해본다. 농사를 짓고 동네주민들과 막거리 잔을 기울였다. 밀집모자에 손녀를 뒷자리에 태우고 뒤뚱뒤뚱 자전거를 타던 모습이 아이콘처럼 남았다. 그런 촌부가 된 전직 대통령도 보기 좋다 했었다. 재벌집 회장님을 했던, 장관, 법관을 했던 퇴임하고 제2의 인생은 저 하기 나름일테다. 고명한 님들을 재단해 볼 일도 아니다. 나 스스로라도 퇴직을 맞이하면 뭐라도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다시 해볼 일이 아닌가. 그러니 책방을 내겠다는 전 대통령의 행보가 나는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

책방이라니, 이제는 책을 사러 서점에 가는 일도 희귀한 일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먹거리, 입을거리, 신을거리 죄다 클릭 몇 번이면 내일이라도 집 문 앞에 배달된다. 포장해서 배달하기도 쉬운 책이야 오죽하겠나. 온라인 서점 한 두 곳에 아이디 없는 사람은 드물 거다. 책 냄새나 맡아보자고 서점을 일부러 찾아가던 일도 코로나19로 3년이나 두문불출이 습관이 되다 보니 낯선 일이 돼버렸다. 그러니 제법 먼 양산이지만 새로 생길 책방이 슬쩍 기대도 된다.

몇해 전까지 노벨상 시즌마다 이름이 거론되던 유명 시인이 또 시집을 내 화제다. 시인이 시집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후배 시인 성추행 문제로 논란을 일으킨 뒤 법정 다툼에서도 패소하고 교과서에 실린 시들이 삭제되기도 했다. 사과는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데 불쑥 새 책이 나왔다. 책이 무슨 잘못이겠나 만은 어지간히 불편한 신간이다.

새해가 아직 첫 달이다. 신년 결심으로 ‘올해는 독서다’ 하고 결심하지 않더라도 나이가 들수록 독서는 늘 숙제다. 세상소식은 웹사이트의 무수한 기사들을 읽을 엄두도 안나 한 줄 짜리 제목에 의존하고, 손바닥만한 휴대폰에 조차 한 페이지를 넘어가는 타래글은 읽기 마저 귀찮아진다. 숙제는 해치워야 마음이 편한 법. 작심삼일이라도 책장을 한번 들춰 볼 궁리를 하며 이런 저런 책 소식에 한 눈을 판다. 전직 대통령이 책방지기가 되면 안될 일이 뭐 있나. 정치적 셈법을 대는 정치평론가들의 밥벌이가 안쓰럽다. 함민복 시인은 ‘시가 밥이다’고 했는데 고명한 어느 시인의 뻔뻔한 밥벌이도 애처롭기가 비슷하다.

채민우 (진주시 상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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