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옥희 진주여성회 대표
가족이 오랜만에 모이는 설연휴에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5살 아이에게 “여자가 여자답지 못하게 뛰어다니노”, 공룡 영상을 보며 무섭다는 6살 아이에게 “사내도 아니네”라는 말을 무심코 내뱉는 어르신의 말에 남자답게, 여자답게 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생각해 본다.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을 규정해 놓은 성역할과 그에 따른 성차별은 전통적인 관습, 문화와 함께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 있다. 나부터 명절 때 시가에 먼저 가는 관습을 바꾸기 어렵다. 여전히 많은 시어머니들은 아들이 자신의 부엌에서 일하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돌아서면 밥하고 설거지하는 며느리 입장에서 명절은 행복하지 않다. 가사노동 집중의 날이다. 여전히 다수의 사람들이 ‘남자답게, 여자답게’에 맞춰 살아가느라 억압과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성차별이란 특정 성이라는 이유로 억압과 착취를 강요받는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 둘째 혜택과 보상에서 차별을 받는 분배의 불평등을 당하는 것, 셋째 동등한 참여가 제한되는 사회적 배제를 당하는 것, 넷째 차등적, 차별적인 가치와 의미가 부여되는 불인정과 무시를 당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성차별은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을 정해놓고 자신의 성과 다르게 행동하면 제약이 따랐던 전통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자는 조신해야하고, 목소리가 크면 안되고, 다소곳해야 하고, 출산과 육아가 당연하고, 가사노동이 당연한 집단, 남자는 능동적이어야 하고, 목소리가 커야 하고, 용감하고 징징거리지 않고, 쫄지 않고 책임감이 있는 것이 당연한 집단이라고 사람을 나누었다. 이렇게 성역할을 나누고 여성성, 남성성으로 규정하고 사회화해 온 사회적 성을 ‘젠더’라고 한다. 젠더는 사회마다, 시대마다 다르다. 계묘년 2023년의 젠더규범에는 아빠가 아기띠를 하고 유아휴게실에 들락거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불과 10여년전 만해도 젠더규범에 어긋난 일이기도 했다.
“원래 선천적으로 여자와 남자의 기능은 다르니 달리 일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 역할 분담한 것도 차별인가요?” 성평등 교육에서 가끔 받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심호흡을 하고 대답에 나선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로 인해 역할을 나눈 것에 대해서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여성의 일이라 부여받아 해왔지만 차별이라 인지하지 못했고, 차별을 인식한 여성들이 투쟁에 나선 것이 여성주의의 시작이다. 여성성, 남성성에 갇혀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배워보지도, 시도해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고, 무슨 일이든 도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평등교육을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열등과 우등으로 나누며 합당한 이유 없이 동등한 대우를 해오지 않았던 것들의 총체가 차별이다. 그 차별의 중심에는 권력자가 있다. 국가는 공식적으로 성차별을 공고히 해왔고 강화해왔다. 남성의 노동을 원활하게 공급받기 위해서는 가부장제가 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당연한 여성의 일로, 경제적 활동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한 인식은 노동현장에서 최저임금, 낮은 대우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성역할 고정관념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모두에서 차별로 이어지게 작동된다. 나의 작은 말 한마디와 생각은 나한테서 끝나지 않고, 가족, 사회로 연결된다. 논쟁하기 싫어서, 유별난 사람이 되기 싫어서 참아내면 차별은 그대로 전승될 것이다. 나부터 차별의 연결고리를 인권과 평등의 연결고리로 바꿔 끼어보자. ‘남자답게, 여자답게’ 말 대신 ‘사람’을 넣어보고 말이 되는지 확인해보자. 말이 안 된다면 굳이 넣을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자세,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이자,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힘으로 무시하고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인권과 평등의 가치부터 우선시 되도록 말에서부터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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