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봄날의 취미 여덟 가지
[경일춘추]봄날의 취미 여덟 가지
  • 경남일보
  • 승인 2023.04.0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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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4월. 전국의 산하는 상춘객으로 붐빈다. 산수유, 매화가 개화하는 3월 초순부터 벚꽃, 배꽃이 피고 지는 4월 중순까지 섬진강 길과 진해, 경주 등 유명 꽃놀이 명소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호객하는 장사치의 고함에 사진 찍기 바쁜 사람들까지 이리저리 밀리다 보면 꽃향기도 맡기 힘들 정도다. 봄과 꽃을 소재로 한 그림이나 시(詩), 음악은 부지기수인데, 요즘 사람들의 상춘 취미는 그런 호젓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옛 선비들의 봄맞이는 지금보다 더 고졸(古拙·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한 운치가 있었다. 그네들은 겨울밤 내내 얼린 물로 빙등(氷燈)을 만들고 그 안에 촛불을 밝힌 다음, 방 안에서 일찍 꽃피운 매화 분재를 감상하며 미처 오지 않은 봄을 기다렸다. 18세기 이유신(李維新)의 그림 ‘가헌관매도(可軒觀梅圖)’를 보면, 과연 흰 눈이 소복이 내린 겨울밤 선비 네 사람이 사랑방에 모여 앉아 꽃핀 분매를 촛불에 비춰보며 감상하는 모습이 소담스레 그려져 있다. 봄이 오기를 기다려 분재에 매화를 심고 따뜻한 방안에서 미리 꽃을 피워 침구들과 함께 대춘부(待春賦)를 지으며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귀양살이에서 누릴 만한 봄날의 취미를 여덟 가지나 찾았다고 했다. 바람에 읊조리기, 달구경, 구름 보기, 비 바라기, 산에 오르기, 물가에 가기, 꽃구경, 버드나무 완상하기가 그것이다. 특히 그는 ‘귀양살이의 여덟 가지 흥취’(遷居八趣)라는 시에서 “실버들 천 가지 만 가지/ 가지가지 푸른 봄을 만났네/ 가지가지 봄비에 젖으면/ 가지가지 사람의 마음을 졸이네”(楊柳千萬絲 絲絲得靑春 絲絲霑好雨 絲絲惱殺人)라고 썼다. 그에게 봄은 버드나무 가지처럼 천 가지 만 가지 다른 표정으로 느끼는 푸른 봄, 즉 ‘청춘’이었다. 버드나무의 셀 수 없는 잔가지가 봄비에 젖으면 그 가짓수만큼 마음도 설레는 계절인 것이다.

그렇다. 이 계절에는 어디서나 의기양양 연초록 옷자락을 뽐내며 봄이 탄성처럼 뛰쳐나온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4월이 ‘천치와 같이 중얼거리며 꽃 뿌리고 온다’고 했고, 또 어떤 시인은 4월을 가리켜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썼다. 그러나 범속한 사람에게 4월은 겨우내 걸쳤던 무겁고 두꺼운 옷을 벗어 버리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싱그러운 달이다. 이런 계절에 선인들처럼 운치 있게 얼음등잔에 불 밝히고 봄꽃 기다리는 정성이나, 또는 다산 선생처럼 소소하나 천만 가지로 마음 설레는 호젓한 상춘 취미 한번 따라 해 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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