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용 진주시의회 부의장

8·15 광복과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었던 가난한 신생국가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문화적으로 탁월한 세계 굴지의 대국이 된 까닭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정체(政體)와 시장경제주의의 방향성 아래서 온 국민이 교육에 온 열정을 쏟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집안의 전 재산과 같은 소를 팔아 대학 등록금을 납부했기에 대학은 학문의 상아탑이 아닌 우골탑(牛骨塔)으로 불렸으며, 배움만이 살 길이라 생각하며 도시로의 유학이 곧 성공의 보증수표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따라서 경제개발과 함께 시작된 이농현상은 단순히 농촌에서의 부족한 일자리를 구한다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지만 더 좋은 학교에 자식을 진학시키고자 하는 학부모들의 열망 역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진주만 보더라도 일제 강점기 때 개교한 이른바 삼진(三晉)학교로 불린 진농(晉農), 진고(晉高), 진사(晉師)가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명문 사립학교와 국립대학이 줄지어 개교해 가히 진주는 경남의 교육수도가 됐다. 하지만 같은 진주 생활권이었어도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진양군 면지역의 경우 상대적으로 교육의 혜택을 크게 보지 못했었다.
현재 문산중, 대곡중, 진양고는 혁신도시로 이전을 완료했으며 곧 대곡면에 있는 대곡고 역시 이전될 계획이다. 잘 아시다시피 대곡고는 대곡면 단목리 출신 재일교포 하경완 선생이 당시 막대한 사재를 투입해 기부 채납해 개교됐으며, 이후에도 선생은 운동장, 교육기자재 등을 종신토록 지원해 열악한 농촌 교육환경 개선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하 선생은 일본에서 모은 피땀 같은 재산을 진주를 위해 환원했는데, 대곡면 일원의 전기, 수도 개설은 물론 한때 관광도시 진주의 면모를 일신해 준 중앙로타리의 컬러 분수대와 진양호반의 우약정(雨若亭)까지 사재로 지원한 큰 업적이 있는 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생이 말년에 호화분묘 사건에 휘말려 안타깝게 객지에서 서세하신 후, 염량세태를 보여주듯 진주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어갔다. 어디 이러한 사람이 비단 하 선생님에게만 그치랴. 과거 마을 단위의 초등학교 역시 지역민의 희생과 헌신으로 개교됐던 것들이 학령인구의 감소와 함께 폐교되고 난 뒤, 그 재산이 마치 원래부터 국유였다는 듯 교육청 재산으로 환수되는 예를 보면서 사라지는 폐교들과 함께 그 창학(創學) 정신마저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 했다.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듯, 학교 이전이라는 제삿밥에 눈이 멀어 지역교육을 위해 헌신한 그 분들의 정신마저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아무쪼록 지역의 숭고한 정신이 이전되는 학교에도 계승되어 지역과 사회의 동량이 끊임없이 배출되길 기대해 보면서 행정과 교육당국의 보다 섬세한 정책적 결정과 집행을 당부하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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