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의학사 속의 유이태
[경일포럼]의학사 속의 유이태
  • 경남일보
  • 승인 2023.05.02 15: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희복 진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송희복 진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유이태는 경남 산청 출신의 민중의술가이다. 그는 한때 앞 시대의 사람인 허준의 스승으로 왜곡되기도 했다. 그가 보여준 의술은 입소문이 났다. 뭇사람들이 다투어 달려오니 문 밖에 신발이 가득 차고 넘쳤다. ‘승정원일기’에는 그를 두고 영남의 명의, 영호남의 유명한 의원이라고 두 차례나 적시하고 있다. 극소수 왕실 귀인들의 몸 앓음 상태를 주시해온 허준은 의료의 원리와 시스템을 우주의 원리에서 찾았으리라고 본다. 말하자면, 저 중국의 ‘황제내경’에서부터 우리나라의 ‘동의보감’에로 이르는 동양의학의 긴 여정은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본 의학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양의학의 역사는 기(氣)를 해석하는 역사다. 허준에 의하면, 태초는 기가 시작되는 것이며, 사람은 천지의 기로써 태어난다. 그의 기가 형이상학적인 관념으로서의 정기라면, 유이태의 기는 존재론적인 경험의 기틀(機)이기도 하다. 생명의 낌새를 알게 하는 실존의 세계다.

유이태는 잊을 만하면 다시 나타나곤 한, 조선시대의 소아 죽음의 병인 홍역에 대한 전문 치료 서책 ‘마진편’(1696)을 저술했다. 그의 거주지인 산청의 사찰에 승려들이 집단으로 홍역을 앓았는데, 그가 이를 찬 샘물로 예외 없이 다스리고는 이것이 체온이 높은 증세, 즉 열증(熱症)임을 확인한다. ‘인서문견록’(1709)에 이르면, 잡병에 대한 철저한 ‘경험(처)방’에 의존하고 있다. 문견은 견문인바, 견은 내가 경험한 증례요, 문은 남이 전해준 의술 정보이다. 고대인의 생각에서 볼 때, 질병은 일종의 생리 현상이며, 큰 틀의 자연 현상이다. 이런 자연철학적인 의학에 대해 반기를 든 이가 히포크라테스와 그의 추종자들이다. 고미숙이 ‘동의보감’을 의서를 넘어 자연철학서라고 평가했거니와,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는 이 고전은 치유 현실 이전에 하나의 철학이었다. 허준이 기를 바라보는 기본 원리는 히포크라테스 의학 이전의 수준이다. 히포크라테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인체 원리나 질병의 원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보면서, 경험으로 알게 된 치료법을 찾는 데 주력했다. 조선의 히포크라테스는 허준이 아니라, ‘득유소험’이니 ‘잡병지경험’을 스스로 밝힌 유이태라고 보는 게 이치에 맞다. 이 말이 허준보다 유이태가 낫다는 의미가 아니다. 극소수의 왕실 환자보다 민중의 증세를 널리 살펴본 유이태의 의술이 더 경험적이라는 얘기다.

히포크라테스 이후에 등장한 알렉산드리아 해부학은 2000년 동안에 걸쳐 서양의학을 지탱해왔다. 서양의 해부학은 네덜란드의 학문인 난학(蘭學)이라고 해 근세 일본에 전해졌다. 우리의 북학파가 북경 청나라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 때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 해부학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해부학에서 발전된 해부병리학이 현대의학의 바탕을 이루었다.

유이태의 시대는 천연두와 홍역이 창궐했다. 그는 이 두 가지 질병이 서로 비슷하면서도 전자가 5장(五臟)에서 일어나는 음의 병증이며, 후자가 6부(六腑)에서 일어나는 양의 병증이라고 대조했다. 그는 자신이 고찰한 바를 탐구하고(究其所考), 증험한 바가 있어 얻은(得有所驗) 지식과 정보를 이용하는 마음(濟衆人心)을 가졌다. 이 마음이 바로 인술이다. 그는 유교적 휴머니스트다.

질병을 이해하는 것은 당대의 인간과 이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며, 또 질병을 설명하는 방식은 그 시대 지적인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 방식은 시대정신과도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왜 ‘화병’이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있나? 우리가 사회문화적으로 인지한 질병이어서다. 질병관도, 치유법도 이처럼 시대정신이나 사회문화의 소산인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