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대 수필가

삶의 여정은 생존과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전진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고 잊히는 기억상실의 연속이다. 아픔의 강을 건너온 사람들에게 기억상실은 치유의 약이기도하나 잊지 말아야할 것들까지 까마득히 잊는 것은 서글픈 역사 부정이기도하다.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부처님의 자비로 마음에 쌓인 탐진치(貪瞋癡)를 조금이라도 녹일까하여 사찰을 찾았다.
그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조선 최고의 서화가 추사 김정희선생의 유작, ‘판전(板殿)’이란 서각작품을 만난 것은 진정 흥미로운 일이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 쓴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정치적 이념이나 제도가 앞섰다고 선진국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문명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리스나 로마가 그 시대 세계 최고의 국가로 군림한 것은 그들이 향유했던 문화와 예술에 근거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국인의 정교한 손재주는 세계가 인정한다. 불국사 석굴암에 팔만대장경을 만든 그 유전자가 오늘날 반도체와 세계적 일류 공산품을 만들어낸 기저에 흐른다. 바야흐로 한류가 대세다. 아직 서각은 변방의 예술이며 작가의 자기만족 예술에 머물러 있는지 모른다. 대중화가 부족하고 동호인 위주의 활동이 주를 이루지만 서각이 한국의 대표적 예술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작품을 만들면서 깨달음을 얻고 서예와 회화, 조각은 물론 설치까지 포함된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서각 예술이 그 영역을 세계로 조금씩 넓히고 있다. 작년에는 튀르키예 한국대사관 내 한국문화원에서 서각 강의가 있었고 올해는 한국서각작품에 대한 뉴질랜드 초청전도 열린다고 한다. 칼과 나무와 씨름하며 오로지 인내와 혼으로 창작의 세계를 열어가는 우리의 서각작품들이 한국 고유의 전통예술을 넘어 세계적 예술의 한 장르로 발전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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