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638)
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638)
  • 경남일보
  • 승인 2023.06.13 2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88)조선조 여항문학의 중심 유희경과 이매창(2)
여항문학자 촌은 유희경의 연보를 보면 1545년 을사년에 한양 대묘동(현 종로구 훈정동)에서 태어나 종로구 원서동에서 살았다. 13세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여묘살이 중 수락산 선영을 오가던 남언경의 눈에 띄어 후의를 입었다. 그의 연보에는 과거급제나 벼슬살이한 흔적이 없다. 15세때 3년상을 마치고 남언경(양주목사)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관혼상제)를 배웠고 이어 20대에 영의정 출신 박순에게서 당시(唐詩)를 배웠다. 벼슬에 들지는 못했지만 양반이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다.

29세에 도봉산 도봉서원이 세워질 때 남언경이 주도한 일에 촌은은 안팎의 일을 도왔다. 담양 석연정에서 의병장 고경명을 만났고 석천 임억령을 만났으니 그의 행보에 의병 돕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41세에 부안에 놀러갔다가 본명이 향금인 매창과 풍류로 더불어 즐겼으니 생애의 한 시운 같은 언덕을 넘게 된다. 처음 만남에서 촌은집 제2권 ‘행록’에 있는 대로 매창이 촌은에게 대뜸 “공이 도성에서 시객이라 하니 유희경과 박대붕 중에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다고 하니 매창의 실력이 탄탄했음을 보이는 한 광경이다.

후에 이별한 뒤 매창은 다음과 같은 시조로 간절한 시정을 읊었다. “이화우(梨花雨) 흣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괘라” 이 시조는 규장각본으로 박효관·안민영이 편찬한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데 주가 덧붙여 있다. “계랑은 부안의 이름난 기생이다. 시를 잘 지었으며 ‘매창집’이 있다. 촌은 유희경의 애인이었는데 촌은이 서울로 돌아간 뒤 아무 소식이 없었으므로 이 노래를 짓고는 절개를 지켰다.”

촌은은 57세에 창덕궁 서쪽 계곡 금천(錦川) 근처에 땅 한 구역을 사서 흙과 돌을 쌓아 누대를 지은 뒤 시냇물을 끌어들여 이름을 침류대(枕流臺)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이곳에는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과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을 비롯해 당대의 이름있는 학자와 관료들이 찾아와 시를 나누고 풍류를 즐겼다. 아마도 이때 계류를 집으로 끌어들인 사례는 촌은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전국의 풍류객들은 이런 자연을 인위적으로 끌어들이고 산수간 의미를 만들어 멋을 부렸는데 현대에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힐링의 공간을 모색할 때 침류대를 참고한 것이 아닐까 한다. 물을 베게 삼는디는 말 자체가 시문이다.

한때 영안위 홍주원(선조의 사위)이 침류대를 날마다 찾아왔는데 인목욍후(선조의 계비)가 이 말을 듣고 살펴보게 했다.그랬더니 비단 도포를 입은 공자들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함께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고 했다. 이후로 영안위가 나간다는 말을 들으면 궁궐의 연육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나중 그 땅이 궁성으로 편입되자 소나무는 그대로 남아 있어 궁중에서 아는 사람들은 저 소나무는 유아무개가 심은 것이라 알아봤다는 것 아닌가.

유희경의 풍류와 문장이 여항문학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벼슬아치들 벽을 뚫고 마침내 구중궁궐까지를 넘나들었다. 당시 문장 풍류는 반상의 경계가 없고 그 자체만으로 차등의 품계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촌은이 68세때 이수광이 유희경 ‘침류대기’를 썼고, 71세때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이 ‘유희경전’을 써서 촌은을 칭송했다. 어우야담에 논개의 기록이 담백하게 남아 오늘에 구전해 오는 근거가 되었다. 진주의 경우 ‘어우야담’은 늘 지척에 있는 자료에 속한다.

김창협이 쓴 ‘촌은집서’를 부분을 읽어보자. “유희경은 여정에서 나와 시를 공부하고 예절을 익혀 당당히 선비 군자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살던 침류대는 궁정으로부터 거리가 지척간이었지만 얽매이지 않고 맑게 앉은 것이 마치 숲속에 있는 사람과 같았다.내가 젊었을 때 선배들의 문집을 읽다가 종종 ‘침류대’ 시를 보고는 그 사람됨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상상했는데 만년에 그의 시고를 손자 유자욱에게 얻어 읽어보았다. 이를 통해 그가 진실로 스스로 대인의 기질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