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98) 비 갠 여름 아침(김광섭)
강재남의 포엠산책(98) 비 갠 여름 아침(김광섭)
  • 경남일보
  • 승인 2023.06.2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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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갠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의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시골은 하늘도 산도 가까이 있었어요. 비 갠 아침엔 특히 그러했죠. 그런 아침엔 엄마는 더 부지런해졌어요. 밤사이 내린 비로 너저분한 마당에 가루세제를 풀어 솔로 문질렀어요. 엄마 손길이 닿는 곳마다 거품이 보글보글 피어났죠. 그러면 긴 호스로 물을 끌어와 거품들을 씻어내기 시작했어요. 물에 씻겨 떠내려가는 거품들은 꽃의 사체 같아 보였죠. 햇살이 퍼지기 전에 얼른 씻어야 마당이 온전한 햇빛을 받을 거란 생각을 했을까요. 마을에서 가장 넓은 마당을 가진 엄마는 이때만큼은 마당에 온 정성을 다하는, 거룩한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으로 보였어요. 퍼진 햇살에 마당이 말끔하게 마르면 그때부터 마당은 난리가 나는 거예요. 햇빛이 튀고 구르고, 장난기가 발동한 햇빛의 웃음이 굴러다니는 것까지 다 보였어요. “비가 갠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니 얼마나 투명한 날이었겠어요. 엄마가 마당을 씻는 일은 여름 아침이 “녹음의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쓰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겁니다. 비 갠 아침에 이제 내가 엄마의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인간의 이원적 분별심은 잠깐 내려놓는 거죠. 청량한 여름맞이에 하루를 써보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거든요. 여전히 주택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어릴 때 보았던 마당에서 뛰놀던 햇빛이 지금은 우리 집 마당에서 그러고 있어요. 어젯밤에 한차례 비가 왔어요. 하늘이 옥상으로 한걸음 가까이 내려왔네요. 청량한 여름날입니다.

통영문학상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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