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대 수필가

숲이 좋은 계절이다. 고향마을 숲에는 수십 그루의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와 말채나무가 어울려 산다. 마을의 보호림으로 수백 년 세월을 한 곳에서 터 잡고 살았다. 예전엔 몇 백 명의 주민이 살던 제법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스무 명 남짓이 전부다.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져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웅숭깊은 숲이다. 세월은 늙음과 사라짐을 만든다. 오르고 나면 다시 내려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사람이든 나무든 세상 그 어느 것도 이런 진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고향을 들릴 때마다 마을 숲 고목들한테서 삶의 지혜를 구한다. 봄 햇살을 받으며 움이 돋고 새싹이 트는 환희의 순간뿐만 아니라, 풍성하고 넓은 잎으로 온 나무를 장식하고 해로부터 받은 빛과 열기로 생명을 키워가는 감동의 시간들을 되짚어 본다. 수백 년을 이어온 숲의 나무는 여전히 시간을 쌓으며 역사를 만든다.
어느 인류학자는 인간과 고래만의 이러한 다름은 부모자식 간 가르침을 뛰어 넘어 조손(祖孫)간 이어가야 할 특별한 지식과 감정의 교류가 필요한데서 기인한 것이라 말한다.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삶은 부모세대의 지식을 넘어 보다 깊고 넓은 지혜가 이어져야함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 소멸의 순간까지 종족유지 본능을 가진 고목은 또 다르다.
세월의 무게를 가지 버리기로 버티는 늙은 나무들을 보면 배움이 있다.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고통은 무게를 줄이고 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함이다. 나무 등걸에는 푸릇푸릇 이끼가 자라고 옹이 틈에는 할머니 흰 머리 같은 성긴 거미줄이 이리저리 쳐졌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어떤 생명도 내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무거운 사람보다 유쾌하고 가벼운 사람이 좋고 어두운 곳에서 햇볕을 피하는 사람보다 밝은 햇살 아래서 숲을 거니는 사람이 건강하다 했다. 경박(輕薄)하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어둡지 않으면서 진중(鎭重)한 사람 곁에 있으면 마음이 담박해진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음의 의미를 스스로 만드는 고목을 볼 때마다 미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한다. 쓸모없는 곁가지를 스스럼없이 버리는 고목 앞에서 나이가 들면 왜 하찮고 작은 것들을 떨쳐야하는지를 느낀다. 옛 성현들도 깨달음을 얻고자 숲을 찾았다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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