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고문헌 현장 11] 혜산 이상규의 문중 계승과 부흥
[경남의 고문헌 현장 11] 혜산 이상규의 문중 계승과 부흥
  • 경남일보
  • 승인 2023.07.1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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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와 서당을 만들어 문중 부흥의 기틀을 닦다
‘창업이수성난(創業易守成難)’이라는 말이 있다. 일을 시작하기는 쉽지만 이룬 것을 지켜내는 것은 어렵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혜산 이상규의 사례를 통해 문중의 찬란한 학문과 전통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왔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진성 가진리 이인형 문학비

진주 진성면에서 대곡면으로 가다 보면 가진리가 나온다. 가좌리와 진동마을의 이름이 합쳐서 가진리가 된 곳이다.

마을 안쪽을 찾아들면 2004년에 세워진 매헌 이인형 문학비와 용두정이 있다. 비석 앞면에는 ‘매창월가(梅.月歌)’라는 한글 가사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전국 60여 명의 국문학 교수와 문학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인형은 어떤 인물이기에 전국의 학자들이 이 시골 마을에 문학비를 세운 것일까?

 
매헌 이인형 문학비와 용두정(진성면 가진리 소재)
매헌실기와 매창월가(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소장)

◇매헌 이인형

매헌(梅軒) 이인형(李仁亨, 1436~1504)은 조선 초기 대사성 이미(李美)의 큰아들로 태어나 점필재 김종직의 사돈이자 문인이 되었다.

매헌의 부친과 네 형제는 모두 과거에 응시하여 6급제를 해 조선 초기 학문과 명성이 높았다. 특히 이인형은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젊은 나이에 벼슬에 나가는 것은 교만한 성품을 기른다고 하면서 집에서 문을 닫고 더욱 열심히 독서해 33세에 장원급제했다. 전라도 관찰사, 한성부 좌윤, 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성종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성종은 이인형이 태어난 마을을 ‘가좌촌(嘉佐村)’이라 이름 지어 주었다.

만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용두정을 짓고 은군자의 삶을 살면서 ‘매창월가’를 지어 매화·창문·달을 벗하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정극인의 ‘상춘곡’이 창작된 직후에 지은 것으로 국문학사상 사대부 가사 문학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인형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폭정을 충간하고 무오사화 때 죄없이 죽어가는 젊은 유생들을 구하기 위해 상소문을 올렸는데, 사후에 부관참시 되는 비운을 겪었다. 중종반정 이후 곧바로 신원되어 예조판서로 추증되었지만 무오, 갑자 2대 사화로 인하여 매헌 문중은 큰 타격을 입었다. 예형, 지형 두 동생도 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후손들은 경남의 고성, 진주, 함안, 거제로 흩어져 관직과 학문으로부터 오랫동안 멀어지게 됐다. 매헌 문중은 사화 이후 고성 무량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침체한 문중의 학문을 부흥시키고 가문의 영광을 만회하기 위해 깊은 고심을 하게 되었다.

◇문중 부흥의 시동을 걸다

조선말기 남인의 대가 성재 허전이 김해도호부사로 부임해 강학하자 경남의 많은 선비들이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매헌의 후손 각포 이제권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또 차남 상규와 삼남 형규도 성재 문하에 보내 수학하게 해 장래를 기약했다. 각포공은 고성에서 세거지를 옮길 계획을 하고 진주 가천리, 하동 화개, 산청 등지를 두루 돌며 마땅한 터를 물색하다가 1880년 문중 가솔들을 이끌고 고성 무량리에서 산청 묵곡리로 이주했다. 산청에는 성재 허전 문인 30여 명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중 부흥의 적임지였다. 그러나 각포 공은 묵곡으로 옮겨온 지 1년만에 별세하고 말았다.

각포 공의 뜻은 결국 아들 혜산 이상규가 계승하게 됐다. 혜산은 어려서부터 출사를 꿈꾸고 있었다. 문중 부흥을 바라는 부친의 뜻이기도 했다. 19세 되던 해인 1864년 과거에 응시하여 포부를 펼치려고 했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1885년에는 판서 이세재의 천거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됐으나, 혜산은 혼탁한 벼슬길에 다시는 나아가지 않고 문중 자제들을 잘 교육하여 내일을 기약하기로 결심했다.

◇학계 설치와 학이재 건립

각포와 혜산 부자는 자손들 교육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각포 공은 문중 자손들을 교육하기 위해 1843년 고성 집 뒤에 서봉서숙(棲鳳書塾)을 건립하고, 학전(學田)을 설치하여 장학기금을 마련하고, 서책을 구입해 비치했다. 그러나 1880년 고성 무량리에서 산청 묵곡으로 이주하게 되자 문중 자손들을 교육할 기금과 공간이 다시 필요했다. 혜산은 1901년 학이재계첩을 만들어 문중에 육영과 장학기금을 축적했다. 혜산은 축적된 기금을 활용해 1902년 문중 서당인 ‘학이재(學而齋)’를 건립했다. 학이재는 경남 서부지역 성재학파 교유와 문중 학문 부흥의 구심점이 됐다.

 
혜산 이상규 초상화
학이재(이호신 화백)


◇서당 교재 편찬

학이재가 건립되자 혜산은 자손들 교육을 위한 별도의 교재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혜산은 한자 1000자를 활용하여 명나라 멸망까지 흥망성쇠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글을 엮어 1911년 역대천자문을 학이재에서 간행했다. 혜산이 역대천자문을 지은 시기는 조선이 패망하고 일제 치하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혜산은 중국의 역대 흥망성쇠를 분석해 동아시아 역사를 교육하고, 또 동아시아 역대 왕조 흥망성쇠의 과정과 원인을 교육함으로써 초학자에게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자손들에게 조선 패망의 감계로 삼고자 했다.

특히 국가 창건의 요인은 선정과 훌륭한 인재의 등용에 있고, 국가를 패망하게 한 요인은 학정과 사치에 있음을 집중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이는 곧 조선 패망의 원인을 중국의 역대 왕조의 역사에서 찾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상풍요’ 창작을 통한 교학상장

혜산은 묵곡마을 인근에 사는 젊은 학동 33명을 학이재로 불러 모아 경전을 강학하고 틈을 이용해 시 창작 교실을 운영했다.

시 창작 교실을 통해 서로 교학상장하고 친목과 동료 의식을 깨닫게 하였다. 학동들은 선배 학자들과 학문 교유와 교학상장 하는 모습, 묵곡의 아름다운 풍경, 전원생활의 소박한 모습, 묵곡의 풍류 등을 읊은 시 416편을 지었고, 혜산은 이를 모아 1910년 문상풍요를 간행했다.

혜산의 자제 교육과 학문 부흥을 위한 노력으로 문중의 학문이 크게 일어났다.

혜산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많은 문집을 남겼다. 혜산과 자녀들은 문중 선현이 남긴 문헌을 간행하는 일에 착수했다. 먼저 문중 족보인 함안이씨세보(1896) 편찬에 참여했고, 문중 역사를 시대순으로 정리한 혜산지감록(1924)을 간행했다.

각종 문헌에서 매헌 이인형과 그의 아들 이령 관련 문헌을 발췌하여 매헌실기(1929)와 성재실기(1928)를 간행했다. 부친 이제권의 문집인 각포집(1924)을 간행했고, 혜산 이상규는 혜산집(1924), 문상풍요(1910), 역대천자문(1911)을 각각 남겼다. 혜산 이상규의 아우 이형규의 문집인 구산집(1924)을 간행했고, 근래에는 조카 이진훈의 문집인 학고유고(1969), 조카 이진보의 문집인 송오유고(1969)가 각각 간행됐다. 이처럼 많은 문헌이 일시에 간행된 것은 문중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혜산은 희미해진 가문의 역사를 정리하고 부흥시키고자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부친은 묵곡으로 이주 후 1년 만에 별세하고, 형은 22세에 요절하고, 아우도 혜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따라서 부친의 숙원은 오로지 혜산이 맡게 되었다. 혜산은 혼자 남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울러 문중 역사 계승의 위기감을 느꼈다. 따라서 혜산은 문중의 역사를 잘 기록하고 정리해 자손들에게 교육하며 가업을 잇도록 하려 했다. 혜산은 이를 위해 1896년에는 함안이씨족보 간행에 참여했다. 혜산은 문중의 역사 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혜산은 조상의 옛 유적지를 차례로 돌아보고 유래와 소감을 읊은 한시 140여 수를 기록한 혜산지감록(惠山志感錄)을 저술하여 후손들에게 공부하게 했다.

1913년에는 부친을 추모하기 위해 부친의 묘소 아래에 한천정(寒泉亭)을 건립했는데, ‘부친을 위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라고 하며 몸소 터를 잡고 재목을 살피는 등 일생 마지막 사업처럼 정성을 다했다. 한천정은 묵곡 겁외사 뒤에 있다. 현재는 후손 이상석씨 부부가 살고 있다. 주말마다 서울에 사는 이상석씨 아들이 찾아와 정성 들여 관리하고 있다. 한천정 마루에 앉으면 혜산 선생의 숨결이 느껴진다.

 
한천정(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소재)
혜산 문중에서 간행한 고서(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소장)
 
지난 달 7일 학이재 문화행사 중 필자 강연 모습.
◇마무리

혜산의 문중 부흥을 위한 노력은 선조의 봉분을 꾸미는 것도, 제사상을 화려하게 준비하는 수구적인 것도 아니었다.

혜산지감록을 간행해 후손들에게 문중의 역사를 알게 하고, 선조가 남긴 문헌을 간행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 본받게 했다. 경남의 유학자들과 폭넓은 교유의 장을 마련하여 선비가로서의 위상과 결속을 다지게 하였고, 학계와 서당을 건립해 문중 학문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지금은 후손 이현숙 여사가 학이재를 관리하며 매년 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올해로 9회째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은 문중 이해를 돕기 위해 ‘혜산 이상규의 생애와 학이재’, ‘혜산 이상규의 초상화 작품 이해’를 위한 초청 강연이 열렸다.

이정희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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