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규 진주향당 고문
맹자(孟子)를 평가하는 단어가 있다. 우활(迂闊)이다. 사전적 의미는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기’ ‘맹자순경열전’에 보인다. “맹자의 말은 현실과 거리가 멀고, 당시 상황에 맞지 않는 듯이 보인다.”(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라고 평하고 있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상앙과 오기(吳起) 같은 군사 전략가·현실주의 정치인과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와 같은 권모술수에 능한 달변가들을 등용해 패도정치에 기반을 둔 부국강병을 꾀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맹자가 거침없이 내뱉은 ‘인의(仁義)에 기반한 왕도정치(王道政治)’와 같은 주장들은 그야말로 서양의 돈키호테의 말과 행동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시대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맹자의 이상(理想)은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한 이상이었다. 현실을 몰랐거나 외면한 것도 아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오로지 백성을 위한 실현가능한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정치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칼을 쥐고 폭정을 일삼던 사람들을 오히려 우활하다고 이해해야 한다.
인의(仁義)에 기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설파한 맹자의 바람과는 달리 전국시대의 패권은 진시황(秦始皇)이 거머쥐었다. 천하는 통일되었지만 민중들의 삶은 여전히 피폐했다. 나라도 멸망을 면치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무모한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보다는 교활한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들이 득세하는 시대가 결국 어떤 결말을 초래하는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정당은 이념이나 정책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이다. 그런데 정당들이 내걸고 있는 현수막에 이념과 정책은 실종되고, 비난과 비방만이 난무하고 있다. 국민들이 정당 현수막을 ‘후진 정치의 표본’으로 낙인찍고, ‘즉각적인 철거’에 찬성의 표를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아보면, 천재지변으로 인한 재난에 국민들이 목숨을 잃고 고통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길거리의 정당 현수막은 여전히 상대방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과 정치적 희화를 중단하지 않았다. 물난리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이러한 정당 현수막을 통해 정당들이 국민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보기를 권하고 싶을 정도이다.
바라건대, 정당 현수막이 지역의 미래를 담은 아젠다를 제시하는 정당(政黨)간 경쟁의 장(場)이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국민들은 비난과 질책이 아닌 큰 박수와 격려를 보내줄 것이다. 진정으로 국민의 선택을 원한다면 상대 당에 대한 비방과 조롱보다는 지역을 위한 정강정책에 승부를 거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단언컨대, 작금의 정당 현수막을 통한 정치놀음은 전국시대 패도정치에 다름 아니다. 패도의 시대에 왕도(王道)의 기치를 주창했던 맹자의 우활(迂闊)함을 기억해야 한다. 왕도정치의 길은 어렵지 않다.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국민의 뜻을 따르면 된다. 그것이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이다. 정당 현수막의 현실은 정말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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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오는 10월로 예정된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부터 난장판 선거가 되게 생겼다. 현수막 난립 등 여야 독설과 선전·선동이 난무해도 제재할 근거도 수단도 없다.
조금이라도 책임을 느낀다면 여야는 이달 임시국회에서 선거법 개정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안 그래도 지난해 말 국회의 정당 현수막 규제 폐지로 차량 운전과 통행 불편은 물론 일상의 ‘짜증 지수’마저 높아지고 있다.
언제까지 국회 때문에 국민이 끌탕을 먹어야 하는가? 유권자들은 자기 지역구에서 꼴 보기 싫은 현수막을 수없이 붙인 후보자는 인간성으로 보아 낙천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