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늙은 말이 길을 안다
[경일춘추]늙은 말이 길을 안다
  • 경남일보
  • 승인 2023.08.09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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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참진주요양원 부원장
김상진 참진주요양원 부원장

 

요양원에 처음 입소하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초라합니다. 짐이라고는 가방이나 보따리 한두 개뿐입니다. 그리고 병원서 받아 온 의무기록 사본 증명서가 전부입니다. 짐에는 약과 좋아하시는 간식, 입으실 옷이 들어있습니다. 여기에다 여러 질병을 갖고 있어서 거동이 불편합니다. 보행 보조기나 휠체어를 이용해야만 합니다.

평생 사시던 집을 떠나 낯선 환경을 만나면서 불안해하십니다. 부모를 요양원에 맡기고 떠나는 보호자들도 끝까지 돌보지 못하는 죄책감에 눈물을 훔칩니다. 아무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라 해도 참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요양원 생활에 적응해 가시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지혜가 우러납니다. 면회 오시는 보호자를 통해 듣는 어르신들의 삶은 치열하고 찬란했습니다.

지금 요양원에 많이 계시는 90대 어르신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8·15해방, 한국전쟁 등 격동의 역사를 헤쳐 온 분들입니다. 많은 공부를 할 수 없었기에 가난 속에서 땅을 일구는 농부로, 산업현장에서 국가 기간산업을 지탱하는 근로자로, 양심있는 상인으로 살아온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르신의 일생을 알아갈수록 ‘영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초라한 모습의 첫인상은 사라집니다. 입소 어르신이 오시면 궁금증에 자꾸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치매증세가 있는 어르신도 차분히 이야기하다 보면 옛 기억을 되살려냅니다. 노인 한 사람은 도서관과 같습니다. 어르신과의 대화는 도서관에서 책을 한 권씩 읽어가는 재미입니다. 귀가 먹어 옆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못 듣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을 해야만 알아들으십니다. 늘 표정이 밝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서로 욕하고 흠잡는 소리 듣지 않으니 마음이 편해. 사람들 이야기 하는 거 별로 들을 것도 없더라”라고 하십니다. 귀가 먹어 불편할 거라는 생각이 부끄러웠습니다. 할머니 말씀에 깊은 성찰이 담겼습니다. 뒷담화가 일상이 된 우리 아닙니까.

요즈음 정치권에서 터진 노인 폄하 발언을 듣노라면 노인의 가치를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법정 스님은 “잘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셨죠. 중국 속담에 ‘노마지도(老馬知道)’가 있습니다. 한비자(韓非子)의 설림 상(說林 上)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관중(管仲)이 전쟁터에서 길을 잃었는데 늙은 말을 풀어 놓고 그 뒤를 따라가 길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노인들이 쌓아온 헌신과 열정, 지혜를 딛고 오늘 우리가 존재합니다. 우리도 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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