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홍의 경일시단]잘 가(박지웅)
[주강홍의 경일시단]잘 가(박지웅)
  • 경남일보
  • 승인 2023.08.1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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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박지웅)
 

 

여자의 혀는 정직하고 차가웠다

입에서 나오는 가장 낮은 온도 잘 가

마트에서 구입한 제품처럼 건넨 잘 가

나는 잘 가를 받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앞뒤 잘린 토막의 말

잘 가는 피가 빠지는 데 몇 달이 걸렸다

몇 달째 꿈쩍하지 않는 잘 가

가끔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잘 가는 선뜻 나오지 않았다

고깃덩어리로 썩어가는 잘 가를

꺼내어 몇 번 삼키려 했으나

오래된 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냉장고는 온통 사후의 세계

나는 냉장고에 심장을 넣고 기다린다

내 혀는 아직 핏물이 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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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 참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오래 준비된 말이다.

짧은 음절의 그 차가운 통보는 잘 갈아든 칼날처럼 날카롭다.

마트에서 쉽게 구한 물건처럼 별다른 수식 없이 내팽개치진 낭패감에 그 말의 토막들이 오랫동안 가슴에 얼어있다.

냉장고는 버릴 것을 모아둔 것이 아니고 다음에 쓰일 것은 보관하는 곳이다.

잘 가라고 화답이 쉽게 나오질 않는 건, 아직도 그녀에게 대한 연분에 기대를 갖고 상하지 않게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 꺼내보고 내 감정을 삭이면서 아직도 그 이름을 기다리는 것이다.

내 혓바닥에 핏기로 도지고. 부패하지 않게 차갑게 보관 중이다.

잘 가라는 말씀은 아직 유효하지가 않다. 다만 실효 중이다.

미련, 실연, 이따위들. 참 이렇게 아프다.

경남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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