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102)하늘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고 싶었다 -이기철
강재남의 포엠산책(102)하늘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고 싶었다 -이기철
  • 경남일보
  • 승인 2023.08.2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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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하고 헤어진 지 참 오래되었다

지난봄과는 다음 토요일에 만나자고 하곤

한 번도 못 만났다

토요일이 수십 번 저 혼자 떠나가고

나만 모시나비처럼 그를 만나려고 길 위를 서성였다

햇빛은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 몰라

수십 번 단추 끝에 찬찬 감아두었다

이슬의 몸이 어제보다 깨끗해졌다

뒷산에 종잇장처럼 햇살이 쌓이고

햇살 낭떠러지 끝에 서서

하늘이라는 제목을 시를 쓰고 싶었다

백로지 같은 눈이 내리면 저 순한 벌레울음을

어느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하나 세 번 생각했다

익은 열매들이 발등에 떨어지고

가을이라는 말이 계단을 굴러간다

마음이 자꾸 극지를 향하고 있다


긴 장마와 폭염과 태풍 속에서 정신없이 보낸 여름입니다. 어떤 기도는 간절한 곳에 닿지 못해 슬픈 날을 건너기도 하고, 평범한 우리가 아무 일 없이 지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이제 여름은 깊은 상흔을 남기고 서서히 물러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도한 하늘은 푸르기 그지없습니다. 그동안에 ‘토요일이 수십 번 떠나가고 나만 모시나비처럼 길 위를 서성였’습니다. ‘햇빛은 어디가 시작인지 끝인지 몰라’서 수없이 ‘단추 끝에 찬찬 감아두었’고요. ‘뒷산에 종잇장처럼 햇살이 쌓’일 때 비로소 ‘이슬의 몸이 어제보다 깨끗해졌’다는 걸 우리는 알아갑니다. ‘익은 열매들이 발등에 떨어지’는 걸 보면서 하늘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은 ‘벌레울음을 어느 서랍 속에 넣어’야 하는지에 골똘하고 있었겠죠. 시인의 시를 깊이 끌어당기며 우리 같이 좋은 가을을 맞기로 해요. 그러기 위해선 우선 마음을 보살펴야 하겠지요. 여름을 잘 견딘 스스로에게 고생했어, 다독이는 날을 건너기로 해요.

통영문학상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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