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요양원에서 만난 천사
[경일춘추]요양원에서 만난 천사
  • 경남일보
  • 승인 2023.08.2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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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참진주요양원 부원장
김상진 참진주요양원 부원장


노인복지시설에서 일하면서 천사 같은 어르신을 많이 만났다. 삶이 주는 숙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분들이다. 현재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한들 어르신들이 살아온 역사만 할까?

몇 년 전 근무했던 요양원에서의 일이다. 한 할머니의 생활실 침상 뒷벽에 대형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코로나가 심할 때여서 면회를 못 한 자녀들이 할머니의 생신에 보내온 것이었다.

‘우리 할머니 정○○, 23세에 40세 강○○와 결혼’으로 시작하는 글은 제목부터 사연이 많음을 짐작게 했다. ‘91세 생신을 맞아 아들, 딸, 손자, 증손자 드림’으로 끝나는 글을 다 읽은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펼침막에는 아래의 글이 적혀 있었다.

화개골 부잣집 큰딸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독한 계모 밑에서 궂은일을 다 하다가 23살에 나이 많은 40살 홀아비에게 시집을 갔다. 막내가 7살인 네 아들이 딸린 홀아비인 남편. 남편의 손찌검도 받아 내며 식구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추운 겨울, 길거리에 나 앉게 된 가족들을 위해 발에 피가 터지도록 살았다. 75세에도 증손자를 업어 키우며 14명의 식구들 뒷바라지를 했다. 펼침막은 ‘이제 맑은 정신이 아주 작아지지만, 우리를 사랑해 주심에 감사합니다’로 맺었다. 할머니의 삶은 전래동화 속 콩쥐 같았다.(이 할머니는 얼마 후 증손녀가 집으로 모시고 갔다.)

자신의 별명이 ‘동네 젖’이었다는 임 할머니는 잊을 수가 없다. 지리산 아래서 태어난 할머니는 빨치산의 총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몸이 성한 남자는 모두 전쟁에 나갔으므로 친정아버지는 임 할머니를 장애인과 결혼시켰다. 다리가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고된 농사일을 하며 3남 1녀를 길렀다. 쌀가마니를 들어 올리는 힘든 농사일에도 불구하고 젖은 잘 돌았다. 이웃집 젖먹이가 마른 젖꼭지를 물집이 잡힐 정도로 빨아대는 것을 보고 자신의 젖을 선뜻 물려 주었다.

“퉁퉁 부은 젖을 쑥 꺼내서 물리면 울던 아이가 잠드는 게 어찌나 좋던지…” 소문이 나면서 아이를 업은 봇짐장수들도 젖을 동냥 하러 왔다. “내 자식 남의 자식 어디 있소. 다른 좋은 일은 못 해도 젖은 많이 줬어”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지만 내가 만난 요양원의 어르신들은 어떤 처지에서든 베푸는 삶을 사셨다. 주어지는 역경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이 어르신들과의 만남에서 자꾸 부끄러운 자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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