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103)길치 -전윤호
강재남의 포엠산책(103)길치 -전윤호
  • 경남일보
  • 승인 2023.09.0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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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남의 포엠산책(103)길치 -전윤호
 

 


내게 길을 묻는 사람들은 모른다

나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른다는 걸

눈썰미 좋은 이들이 한 번에 찾아가는 길도

보이는 모든 통로를 다 지나가 본 뒤에야

한 길을 선택하는 길치라는 걸

막힌 골목에서 머리 한번 긁고 돌아설 때

내게 화내지 않는 덕으로

지금까지 버텼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도착하는지도 모르지만

아직 걷고 있는 중이다

내가 아는 건

멈추지 않는다는 것

이 길도 끝이 있다는 것

오늘은 걷기에 날씨가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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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치의 다른 말을 자연 친화적 사람이라 부르고 싶군요. 길을 잘 아는 사람은 간판이나 건물을 살펴서 장소를 찾죠. 하지만 길치는 나무와 꽃과 구름과 새의 울음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저도 지독한 길치인데요. 오늘 까치가 앉았던 자리에 나중에도 까치가 앉아 있을 거란 생각. 저 건물 위에 떠 있는 새털구름이 다음에도 그대로 있을 거란 생각.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하면서 걸으니 어찌 길을 익힐 수 있을까요. 아무리 걸어도 목적지가 안 보이니까 불안하고 답답하고 겁이 나기도 했겠고요. 빨리 찾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두려움이 컸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생각보다 길치의 삶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내게 화내지 않는 덕으로” 지금까지 이리 지내고 있으니 이만큼이면 되었다 싶기도 하거든요. 우리의 생이 그런 것 같아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언제 도착하는지”는 더 모르게. 이렇게 지독한 길치여도 계속 걷다 보면 이 길도 어딘가에 끝이 있고 걷기 좋은 날들이 가득하리라 믿어요.

통영문학상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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