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고문헌 현장 12] 해기옹 김령의 ‘간정일록’
[경남의 고문헌 현장 12] 해기옹 김령의 ‘간정일록’
  • 경남일보
  • 승인 2023.09.1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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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정일록’을 통해 바라본 유배와 유배자의 삶
조선시대 유배자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조선 말기 산청 선비 해기옹 김령의 임자도 유배일기인 ‘간정일록’을 통해 유배의 과정과 유배자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간정일록’ 입수

산청군 신안면 적벽산 아래에 김령 영구불망비가 있다. 김령은 대체 어떤 인물이며, 무슨 공적이 있었기에 지역민이 그의 이름을 영원히 잊지 않고자 한 것일까?

근래 산청 단계문중으로부터 기증받은 고문헌 속에 해기옹(海寄翁) 김령(1805∼1866)의 유배일기인 ‘간정일록(艱貞日錄)’이 전한다. ‘간정’이란 ‘어려움을 참고 정절을 지킨다’는 뜻으로 주역에 등장하는 용어이다. 유배살이 하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드러낸 책 제목이다. ‘간정일록’을 통해 김령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면서 유배자의 생활을 엿보고자 한다.

 
김령 영구불망비(왼쪽은 원본, 오른쪽은 새로 세운 비석)
간정일록 표지


◇임자도에서의 생활

김령 부자는 단성현감의 탐학을 하소연할 데가 없는 농민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다가 1862년 6월 단성민란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진주 감옥에 투옥된 인물이다.

아들은 곤장 30대를 받고 풀려났으나, 김령은 전라도 임자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김령은 1862년 8월 18일 단계마을에서 출발하여 함양, 남원, 인월, 담양, 함평을 거쳐 16일 만인 9월 4일 임자도에 도착했다.

죄인이 유배형에 처해지면 곤장을 맞고 먼 곳으로 유배됐다. 유배형은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 고향에 돌아올지 기약을 할 수가 없었다. 죄인은 곤장을 맞다가 죽기도 하고, 풍토병과 배고픔, 외로움 등으로 인해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가족과 오랜 기간 격리되어 생활해야 했고, 생활비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에 곧 멸문(滅門)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김령은 임자도 진리 주민 박윤량 집에서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처음 6개월은 바닷가 생활에 적응이 어려웠지만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갔다. 김령의 귀양살이는 관아의 규제 속에서 엄격히 통제됐다기보다 육지에서 섬으로 추방되어 가족과 고향으로부터 단절된 생활을 하는 정도였다. 여가를 활용해 섬 주민 자제에게 글공부를 가르치고, 섬주민 및 유배객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김령은 사교성이 매우 좋아 금세 임자도 주민들과 친분을 맺었다. 주민들은 김령의 학식과 인품을 알아보고 술과 고기 등을 들고 찾아왔다. 유배지에서의 일상은 독서, 시 짓기, 편지 쓰기, 일기 쓰기, 저술이 전부였다. 김령은 독서광이었다. 하루에 읽어야 할 독서 분량을 미리 정해 두었고, 만일 분량을 채우지 못하게 되면 다음 날 새벽까지 꼭꼭 채웠다. 어떤 날은 편지 쓰는 날로 정하고, 고향에 있는 가족 친척 벗들에게 20여 통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시 짓기도 능숙하여 유배 중 120여 수의 시를 지었다.

 
간정일록 중 1863년 정월 25일 일기 부분


◇가족에 대한 그리움

김령은 유배에서 금방 풀려날 것으로 기대했으나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계해년(1863년) 1월 25일은 닭이 울 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겨울비가 종일 그치질 않았다. 빗소리 쓸쓸하니 유배객의 회포도 끊임없이 생겨났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정신이 말똥말똥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머리맡에는 옷 한 벌이 놓여 있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아내가 정성 들여 지어서 보내온 것이었다. 울적한 마음을 시로 지었다.



어쩌다가 나에게 시집와 그대 지아비 되었구려.
사십 년간 얼마나 험난한 시집살이 하였소?
고약한 성질, 늙고 쇠약해도 여전하더니,
결국, 비린내 나는 이곳에 귀양을 오게 되었소.
갑신년 봄 우리 결혼하였는데,
어느덧 40년이 흘렀구려.
나와 인연을 맺어 평생 고생만 쌓았는데도,
정숙한 성품으로 자식을 훌륭하게 키웠구려.
가련하도다! 흰머리 두 늙은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는데,
어찌하여 멀리 귀양 와서 이별하게 되었는가?
싸늘한 그대의 방을 생각하니 수심과 탄식뿐이겠구려.
간장이 쇠나 돌이라도 어찌 녹고 닳지 않았겠소.



머리맡에 놓인 옷을 바라보니 아내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1824년 김령과 결혼했으나, 곧 남편과 아들은 서울에 과거 공부하러 가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남편이 임자도에 유배된 것이다. 그러니 부모 봉양, 자녀 돌봄, 접빈객, 봉제사는 모두 아내의 몫이 됐다. 그런 아내를 생각하니 관아에 바른말을 하다가 유배 온 자신이 못내 후회스럽기도 하였을 것이다.

◇아들에 대한 기대와 애틋함

김령에게는 외동아들 인섭이 있었다. 간정일록에는 아들 이름이 100여 군데나 등장한다. 아들은 부친을 자주 찾아와 수발을 들었다.

김령은 그런 의젓한 아들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아들에게 고생만 시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닌지 자문하기도 했다. 부친을 방문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들을 임자도 나루에서 이별하며 애절한 마음을 담아 전송했다.

‘운명이구나! 누구를 탓하며 누구를 원망하리오. 삼가야지! 아비가 부끄러운 짓을 하였으니 자식에게 자애로울 수가 없고, 하늘의 밝음을 가렸으니 죄를 얻어 형벌을 불러들였네. 아홉 번 넘어지고 열 번을 뒤집힐지라도 내가 머리를 조아려야 할 일인데, 어찌하여 천신만고의 괴로움을 너까지 겪어야 하겠느냐? 늙은 나는 슬그머니 죽으면 그만이니 쇠약해진 아버지를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들이 훌륭한 선비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김령은 오랜 가난과 영양부족으로 체질이 매우 허약했다. 유배가 길어질수록 혈변을 누기도 하고, 토하기도 했다. 김령은 위장병을 다스리기 위해 음양탕을 복용하기도 하고, 배추를 먹기도 했다. 7월 30일에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 숙소 주인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개를 잡아 주기도 했다. 김령은 1년 7개월 만인 1863년 12월 30일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김령은 유배 생활의 여파로 6개월간 지병을 앓다가 1867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기억과 후세의 평가

단성현 주민들은 김령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변호하다가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간 것에 대해 미안함과 고마움을 늘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글을 모르는 무지렁이 주민들은 권상적(1822∼1900)을 찾아가 김령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권상적은 평소 김령 부자의 성품과 공적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흔쾌히 지어 주었다.



(성어중구) 여론이 형성되어
(각지암석) 이름을 돌에 새긴다네.
(석가륵혜) 돌은 부서질 수 있어도
(명불가륵) 이름은 부서질 수 없으리라.



1896년 4월 적벽산 아래 바위에 김령의 영구불망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2021년 8월 이곳에 피암터널이 생기면서 불망비는 훼손됐다. 지역민에 의해 다시 터널 입구에 옮겨졌다. 김령을 기억하는 지역민에 의해 그의 이름이 길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간정일록 유배자의 유배 과정, 생활 모습, 임자도의 지명, 물산 등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할 만한 책이다. 필자는 이 책의 기록에 따라 지난 6월 23일 임자도를 찾아 나섰다. 함양을 거쳐 88고속도로를 타고 쉬엄쉬엄 가니 승용차로 김령이 16일이 걸린 거리를 약 4시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21년 3월 임자대교가 개통되어 섬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임자도 진리와 나룻터를 찾아가니 임자대교 개통으로 매우 한산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김령의 유배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의 삶을 대변하다가 유배생활을 한 참 선비 김령의 비석 하나쯤 이곳에 세워 기념했으면 좋겠다.

김령은 과거에 급제도, 높은 벼슬도 한 적이 없다. 자신도 가난하게 살면서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힘없는 무지렁이 농민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관리에게 바른말을 하고 농민 사랑을 몸소 실천하다 유배된 참 선비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간정일록과 영구불망비가 남아 그의 선행을 뒷사람들이 길이 기억하고 있다.

 
진리나루 임자면 표지석. 뒷면에는 임자도 역사가 새겨져 있다.
임자도 역사가 기록된 임자도 진리나루 표지석
진리나루에서 바라본 임자대교


이정희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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