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 (650)
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 (650)
  • 경남일보
  • 승인 2023.10.05 19: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04] 후문학파와 노령시학(5)
노령시학에는 먼저 역사적 의식이나 지나간 것에 대한 반추라 할까, 그 사실에 대한 관심이 깃들기도 한다. 『파주기행』에서 「사임당의 묘」라든가 진주의 「어느 종택에 가서」, 그리고 「이 빈 들에 그대 서다」(김대건) 등이 그 역사적 사실에의 접근이다.

「파주기행」 연작 6편은 아내의 수술을 앞두고 파주 딸네집에서 한 달을 지내면서 기행의 이름으로 얻은 시편들이다. 그중 「사임당의 묘」는 사임당의 묘가 파주에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시한 시다. “한국은행 노오란 고액권에 홀로/집짓고 사는/ 사임당// 언제, 언제 이사해 왔는가/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 501번지// 놀라워라 무덤이라니/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525호/ 죽어서도 사적이다// 그대 고액권 한 장 지니거든/ 문산 지나 법원 가는 길 표지판의 이름/ 맞추어 보게나// 사임당은 아직 저 아늑한 강릉시 오죽헌에/ 판각된 글씨 한 폭으로 있거나/ 거기 月下孤舟圖 나지막한 달 아래 배 한척으로 있거나/ 아들 율곡이 몇 번의 소년등과 귀향하는 /삼현육각에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사임당 이미지는 강릉이요 오죽헌에 고정되어, 그의 시가(媤家)가 파주에 있었음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종택에 가서」는 ‘단목리 단지종택’(丹池宗宅)을 방문하고 쓴 시다. “얼마 전 대학 도서관에 기증한 공신 녹권이/ 오늘의 이름으로 문화재, 4백년의 뿌리 한 줄/ 또는 두어줄/ 울 지키는 주인이 그 서사의 일지를 쓴다// 아, 정치를 다 놓고 가문으로 돌아온/ 주인, / 종택은 주인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는/ 조선 유가의 한 필지 성채다, 또는 풍경이다!”

이 시의 초점은 주인(하순봉)이 가문으로 돌아와 지키면서 조선 유가(儒家)의 한 필지 성채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점이 오늘의 종택이 가지는 의미이다.

다음 시는 「이 빈 들에 그대 서다」로 천주교 순교자이자 성인품에 오른 김대건 신부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그대 빈 들에 라틴어체로 서다/ 순교의 맥박으로 순교를 쓰다

빈 들에 서다가 쓰러지는 사람들/ 그대 빈 들에서 쓰고

빈 나라에 서다가 쓰러지는 사람들/ 빈 나라로 쓰다

그대 필체는 조선 갓끈이 내는 바람/ 라틴어체/ 황량하다 빈 들 쓰다듬다가

부드러이 매만지다가/ 제 자리 잡는 한 획.

한 허리다”

김대건은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교육을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된 순교자다. 조선에 돌아와 전교활동과 선교사들 입국을 돕다가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유네스코는 2019년 11월 14일 김대건 신부 탄생 2백주년이 되는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이를 기념하여 한국시인협회가 김대건 신부 기념 사화집을 낼 때 필자는 이 제목으로 써서 기념했다. 그런데 최근 로마 교황청 외벽에 김대건 성상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아시아인 최초, 사제 성인으로는 최초의 일로 기록된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던 시절은 박해의 찬 바람이 블었다. 그것을 시에서는 ‘빈 들’, ‘빈 나라’라 표현하고 김대건은 조선 갓끈(조선의 양심, 선비의 올곧음)이 내는 바람으로 순교했다고 썼다. ‘빈 들에 라틴어체’로 섰다고 하여 성서적 인격의 완성이요, 시대의 한 ‘획’이자 ‘한 허리’로 이미지화 하였다.

노령시학의 노령은 단순히 나이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빈 들의 황량한 바람과 맞서는 그 불굴의 정신 가까이 가고자 하는 형상화와 그 의미를 지렛대로 끌어내는 작업에도 연결이 된다. 그것이 시적 교양주의이기도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