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 (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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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3.10.1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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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 후문학파와 노령시학(6)
필자는 시집 『파주기행』(2023, 8 황금알) 발간기념으로 《저자 사인회 및 저자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지역에서는 창작집 발간이 되면 저자 사인회를 하거나 저자와 대화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필자는 재일교포 유미리 작가가 ‘재일 한국인 작가’라는 그 정체성 때문에 작가 초기에 ‘작가 사인회’를 못하게 하는 일본 일각의 세력이 있어서 소설가가 소설집을 내고도 사인회를 할 수 없었던 그 이픔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자의로 사인회’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사인회를 열었다.

작가 사인회는 왜 하는가? 작가와 그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가 만나는 자리가 되어서 바람직하고 독자가 책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도 좋고 또 작가에게 작품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 물어볼 수가 있어서 좋다. 필자의 경우, 이런 저자 사인회가 있기 이전에는 독자들 나름의 주체적 독회 같은 것이 있었고 어떤 집안에서는 추석을 맞이하여 일가 친척에게 추석 선물로 시집 『파주기행』을 사서 나눠주는 미담도 있었다. 어떤 가족은 이 시집을 가지고 여러 번의 합동 독회를 열기도 하고 어떤 수도권의 문학단체에서는 『파주기행』을 주제로 릴레이식 토론을 갖기도 했다는 것이다.

독자들로서는 강희근 시에서 견문이나, 체험이나, 성찰이나, 병고 위로나, 부부간 사랑이나, 역사 아이러니나 신앙적 진정성 같은 데서 ‘필’을 한 웅큼씩 한 모금씩 얻어낼 수 있었을까? 그래서 어떤 진맛, 단맛, 뭉클한 설레임 일부를 얻어 말하자면 영혼 헹구기의 감동에 미동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을까?

임영조 시인(1943-2003)은 「시인의 모자」라는 시를 남겼다. 시인은 이름을 시인 자신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감동하여 불러줄 때 ‘진짜 시인’이 된다는 시를 썼다.

“나의 새해 소망은/ 진짜 시인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별러도 쓰기 어려운/ 모자 하나 선물 받는 일이다

/시인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 그 노래 멀리서 누군가 읽고/ 너무 반가워 가슴 벅찬 올실로/ 손수 짜서 씌워주는 모자 같은 것

/돈 주고도 못사고 공짜도 없는/ 그 무슨 빽을 써도 구할 수 없는/ 얼핏 보면 값싼 듯 화사한 모자/ 쓰고 나면 왠지 궁상 맞고 멋쩍은/ 그러면서 따뜻한 모자 같은 것”

이런 시처럼 어디서나 팔지 않는 귀한 수제품 같은 것, 아무나 주지 않는/ 시인이란 직위 같은 것을 새해 소망으로 받고 싶다는 것 아닌가.

독자가 만들어 씌워주는 시인의 모자! 독자 주권으로 쟁취한 모자, 어쩌면 민주주의 같은, 그 보편성 같은 가치요 길이다. 시인의 길!

필자는 이번 『파주 기행』을 그런 길 위에다 놓고 싶었다. 그게 어찌 한 숟갈로 떠 먹을 수 있는 일이랴? 줄을 서서 필자의 사인을 받는 대열을 보면서 아, 이 대열이 그 모자를 받는 하나의 통과의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의 이 대열은 미미란 것이나 시집 열여덟번째에서 처음의 ‘필’이라면 ‘필’일 것이다.

어쨌거나 필자는 ‘노령사회 노령시학’이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작품 자체를 노령의 물굽이 자체임을 독자에게 고백하는, 스스로의 이름에게 사인을 하는 겸손의 언어로 엎드리고 있다.

필자는 「서재의 의자 풍경」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저자 생애의 기침소리/ 기쁨과 노함의 중간에서 어쩔 수 없이 내는/ 주인공들의 작은 탄성들/ 어떻게 사는 가의 긴 고뇌와 고독의 아침 저녁의/ 빛깔들이 노을로 이글대는 소리/ 그런 몸부림이 찍어내는 생생 생중계의 보도 멘트들/

그리움과 연민들이 새벽에 이르러/ 술독 뽀글거리는 양조의 시간들”

그렇다. 필자의 시는, “술독 뽀글거리는 양조의 시간들” 그 시작인지 모른다. 노령은 그 양조의 소리를 들으며 함께 익어가는 세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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