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정치적 낭만주의
[경일포럼]정치적 낭만주의
  • 경남일보
  • 승인 2023.10.1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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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
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


정치가 양극화되고 있다. 이른바 정쟁(政爭)의 시작은 말싸움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요즈음 정치인들은 서로 만나면 목소리를 높이고 큰소리를 지르고 있다. 인사 청문회장에서는 지×하네, 라는 욕설이 튀어나오고, 35년 만에 대법원장 임명을 부결시킨 것을 두고, 정의의 물구나무를 세웠다라는 수사법도 등장한다. 물론 말싸움은 교활한 음모보다는 낫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말이 민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민심이 반영된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일반 국민도 정치적으로 양극화되어간다. 이들이 정치와 좀 거리를 두고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앞으로 그것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정치가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긴밀해지기 때문이다.

정치에 있어서의 맹목적인 지지가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수십 년에 걸쳐 각종의 선거에서 ‘민주’라는 단어가 포함된 당명을 가진 당만을 지지해 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도 있다. 검찰독재와 사법리스크. 이 상반된 원인적 조건에도 지지의 결과에 있어서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가짜뉴스? 웃기지 마! 다들 이런 분위기다. 지금의 정치적인 지지는 이와 같이 합목적적이 아니라, 맹목적적인 성격을 띤다. 이 견고한 지지세를 두고 정치적 현실이라고 한다면, 사안이나 상황에 따라 선택의 유연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두고 정치적 낭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표현을 처음을 쓴 이는 독일의 칼 슈미트이다, 그는 104년 전의 저서인 ‘정치적 낭만’(1919)에서 정치적 낭만이 기회주의, 순응주의, 의존성, 도덕적 불감증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독일 낭만주의가 애초에 혁명을 낭만화했고, 그 다음엔 지배층의 복고 체제를 낭만화했고, 1830년 이후에는 다시 혁명적인 사상이 되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치적 낭만은 모순투성이다. 어떤 때는 건강했다가, 어떤 때는 병적이었다. 어떤 때는 진보적이었다가, 어떤 때는 보수적이었다.

‘정치적 낭만’은 1990년에 처음으로 한국어로 간행됐다. 그리고 정확히 30년 후에 다시 번역해 간행되었다. 최근 역본의 제목은 ‘정치적 낭만주의’다. 독일어 ‘로만틱(Romantik)’은 낭만이면서 동시에 낭만주의다. 첫 번째 역본과 두 번째 역본의 키 워드 중에서 서로 다른 것은 기회주의와 기연주의다. 기회주의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부정적인 어감으로 여겨온 게 사실이다. 그래서 최근 역본에서는 기연(機緣)이라고 번역했다. 나는 절묘하다고 본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불교 용어로 인연의 기틀, 어떤 기회를 통해 맺어진 인연이다. 보통은 연애하고 결혼하는 남녀관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정치적인 문맥에서는 계기에 의한 엮임새, 유대감, 연대의식을 말한다.

나는 유권자로서 대통령 선거에 일곱 번 참여했다. 참여율 백퍼센트이니까, 모범적인 유권자다. 보수 후보에게 네 번, 진보 후보에게 세 번에 걸쳐 표를 던졌다. 맹목적이고 양극화된 사람들에게, 나는 기회주의자이다. 좋게 말하면, 정치적 낭만주의자다. 정치적 낭만주의를 두고 칼 슈미트는 비판했지만, 나는 건전한 정치미래상이라고 본다. 죽었다 깨어나도 보수, 세상없어도 진보…이런 식이 되어선 곤란하다. 앞으로의 정치는 정치적 낭만의 중도 유권자에게 달려있다.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에 압승을 안겨준 것도, 대선 때 초토화된 보수 세력에 기사회생의 기연을 제공한 것도 그들이었다. ‘회색 군상’이 아닌, 숨어있는 감시자요, 결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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