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놀라워라, 공간의 힘
[경일춘추]놀라워라, 공간의 힘
  • 경남일보
  • 승인 2023.10.2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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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주 거창교육지원청 교육장
이명주 거창교육지원청 교육장


지난해 9월, 거창교육지원청 청사로 첫 출근하던 날,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오래된 청사의 낡은 현관, 그 좁은 공간에는 각종 홍보 문구가 새겨진 배너와 상징물들, 청렴을 강조하는 먹물 담은 투명용기, 그리고 택배상자들이 뒤엉켜 있었다. 온갖 잡동사니로 뒤덮인 듯한 현관, 아찔했다.

직원들과의 첫 만남이 이뤄진 실내 공간, 출입문에는 ‘대회의실’이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걸려있었다. 고딕체의 그 딱딱한 글꼴이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취임식은 그런 공간에서 진행됐다. 청사 가족들은 앞줄 옆줄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배열된 의자에 딱딱하게 앉아 있었다. 나와 청사 가족들은 사각의 공간에서 그렇게 경직된 분위기로 처음 만났다.

취임식 후 나는 직원들과 함께 청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구호가 가득 새겨진 배너들과 각종 상징물들은 지하실에 보관하기로 했다. 택배 보관 장소를 따로 만들고 최대한 빨리 택배 상자를 챙겨가도록 했다. 현관 정리를 하고 보니 거창교육의 비전이 보였다. ‘더 가까이’

거창의 특색 교육이 연극이라는 것도 선명하게 보였다. 홍보성 상징물들이 있던 곳에는 탁자와 의자와 책꽂이를 놓았다. 민원인들과 직원들이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탄생했다. 내친 김에 맞은 편 벽에는 수직 정원도 세웠다. 각종구호가 난무하던 현관이 작은 정원으로 탈바꿈했다.

회의실은 직원들의 공모를 통해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대회의실은 ‘아우름누리’ 소회의실은 ‘도란누리’로 정해졌다. 이름이 달라지자 공간의 성격도 바뀌었다. ‘회의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때는 뭔가 치열한 토론이 오가고 지시와 받아쓰기가 진행돼야 할 것만 같던 곳이 ‘아우름누리’와 ‘도란누리’로 바뀌자 그 공간은 대화와 웃음이 넘치는 곳으로 변해갔다. 누구나 그 공간에서는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맞장구를 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청사 마당의 눈썹 화단에는 넝쿨장미 터널을 만들기고 했다.

“교육장님은 꽃도 못 볼긴데예”, “내가 못 보면 어때, 몇 년 뒤 누군가는 꽃도 보고 사진도 찍겠지” 내년에는 작두콩으로 녹색커튼도 만들기로 했다.

비록 작지만 우리들의 공간이 달라졌다. 현관의 수직정원 앞에서 차를 마시고, 정원의 장미가 잘 자라고 있나 들여다보는 직원들이 생겨났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직원들의 표정도 한결 밝아진 것 같다. 공간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놀라워라 공간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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