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105)염소의 저녁 -안도현
강재남의 포엠산책(105)염소의 저녁 -안도현
  • 경남일보
  • 승인 2023.11.0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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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말뚝에 매어놓은 염소를 모시러 간다
햇빛이 염소 꼬랑지에 매달려

짧아지는 저녁,
제 뿔로 하루 종일 들이받아서

하늘이 붉게 멍든 거라고
염소는 앞다리에 한 번 더 힘을 준다

그러자 등 굽은 할머니 아랫배 쪽에

어둠의 주름이 깊어진다

할머니가 잡고 있는 따뜻한 줄이 식기 전에
뿔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염소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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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쯤 되었을 때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얻었어요. 도통 집 밖을 나가지 않는 딸을 위한 아버지의 배려였죠. 그날부터 염소에게 풀을 먹이러 들판을 나가기 시작했어요. 이른 아침엔 이슬 앉은 풀을 먹이고 오후엔 햇살 반짝이는 풀을 뜯어주었어요. 그러는 동안 염소는 몸이 커지고 뿔이 자랐죠. 그때부터 주변을 뿔로 들이박는 거예요. 바위도 나무도 허공도 모두 다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많은 것을 쥐어박는 염소가 무서웠어요. 어릴 때부터 함께 다녀서 우린 서로를 잘 안다고 여겼는데 나는 염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죠. 말뚝에 매여 종일 하늘을 들이박는 시인의 염소를 보니 그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한데요. 그때 ‘염소의 저녁’을 읽었다면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인식하고 배려하기엔 많이 어렸던 거예요. 염소 뿔이 무서워서 몰고 다니는 일을 그만두는 게 내가 택한 최선이었죠. ‘염소의 저녁’에는 염소와 할머니의 오랜 시간이 들어있어요. 할머니를 모시고 가는 염소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할머니 모습이 다정한 친구 같아요. 생명을 대하는 태도가 존엄하기까지 하고요. 시간이 깊은 만큼의 공을 들여 받아들인 삶이겠죠. 뜨거운 현장을 이렇게 목도하게 되어 벅찬 날입니다. 통영문학상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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