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기차여행
[경일춘추]기차여행
  • 경남일보
  • 승인 2023.11.0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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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화 시인·진주문인협회 감사
이미화 시인·진주문인협회 감사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미국의 심장 전문의사 로버트 엘리엇의 말이다. 시댁 친척을 찾아 갈 일이 생겨 동탄행 SRT를 예매하면서 ‘그래, 여행이라 생각하자.’ 마음 전환을 시도했다. 마침 진주역이 새로 단장하고 아직 SRT 기차를 못 타 봤으니 금상첨화 아닐까.

역내에 들어서니 편의점이 보인다. 계란과 사이다 생각을 하고는 피식 웃다가 주변 커피전문점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 한다. 고소한 커피 향을 따라 플랫폼으로 나오니 서성거리던 바람이 내 스카프를 확 잡아끈다.

여행을 떠나자. 여름 방학을 맞은 단발머리 동네 친구 여섯은 모의를 했다. 목적지는 목포 유달산. 누가 먼저 제안했을까. 아마 이구동성으로 찬성했을 것이다. 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는 삼천포라는 작은 도시는 호기심 많고 역마살이 낀 십대에겐 불편하고 답답했다. 틈만 나면 뛰쳐나가고 싶어 안달했다. 그러나 작은 포구를 벗어날 희망도 용기도 없던 때였다. 여고2, 갑자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친구들은 부모님께는 학교 선생님과 함께 하는 일정이라 속이고 여행가방을 쌌다.

그래 떠나는 거야. 1970년대 말, 밤 열시쯤 목포행 비둘기호에 올랐다. 무박의 객석은 빈자리 없이 꽉 찼다. 좌석 하나를 뒤로 돌려 네 사람이 마주보게 앉아 돌이라도 씹어 먹을 우리는 오징어, 땅콩, 김밥, 과자 봉지를 뜯었다. 객석 곳곳에서도 비닐봉지 뜯는 소리가 부스럭댔지만 누구 하나 지청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뒷자리에서는 아예 여럿이 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아 통기타 연주에 맞춰 박수치며 노래를 불렀다. 낯설음도 이곳에선 다 친구가 되었다. ‘나 어떡해’, ‘연가’, ‘조개껍질 묶어’와 주옥같은 가요를 밤새 떼창하며 무엇을 쏟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악도 썼다. 달빛이 차창에 쏟아지면 우리는 잠깐씩 뜨거운 슬픔으로 반짝거리기도 했다. 누군가 그어놓은 동그라미에 갇혀 캄캄하고 답답했던 미래가 조금씩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숨이 트일 때마다 내 꿈도 싹을 틔워갔다. 우린 신 새벽에 목포 역에 도착했다.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즐기자고 마음을 바꾸니 풋풋했던 단발머리 여고생으로 돌아간 마음이 단풍처럼 붉게 타들어 간다. 저 기차에 무작정 올라 나는 또 소풍을 즐길 것이다. 여행은 내일의 나를 달래고 보듬어 줄 보석을 저금하는 일이다. 내 인생 저금통엔 힘들 때마다 곶감 빼 먹듯 하나씩 빼 먹을 수 있는 보석이 몇 개나 들어 있을까. 오늘 그 중 하나를 빼먹으며 또 하나를 저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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