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 작가미술관 길을 묻는다](2)비겔란박물관·프로그너 공원
[공립 작가미술관 길을 묻는다](2)비겔란박물관·프로그너 공원
  • 백지영
  • 승인 2023.11.19 2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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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물가로 유명한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도 부촌으로 꼽히는 프로그너 지역. 이 지역에는 오슬로 중심부에서 가장 큰 공원으로 꼽히는 도시의 허파, 프로그너 공원이 있다.

하지만 이 공원 입구와 가장 가까운 트램(노면 전차) 정류장에는 다른 이름이 붙어있다. ‘비겔란 공원’ 정류장, 많은 관광객에게 공식 명칭 ‘프로그너 공원’보다 더 또렷하게 각인된 이름이다. 드넓은 공원은 노르웨이 조각 거장, 구스타브 비겔란(1869~1943)의 조각들이 설치된 일부 구역이 인기를 끌면서 한국인 관광객을 비롯한 많은 관광객들에게 ‘비겔란 공원’ 혹은 ‘비겔란 조각공원’으로 불린다. 매년 백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노르웨이 최고 관광 명소로 꼽힌다.

 
노르웨이 오슬로 비겔란박물관 전경.
공원 서쪽 끝자락, 좁은 차도를 건너면 반듯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오슬로시가 운영하는 비겔란박물관이다. 북유럽의 로댕으로 불리는 비겔란의 조각·드로잉·목판화 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공원에 설치된 ‘모노리스’, ‘분수’, ‘화난 아이’ 등 비겔란의 조각들을 작가의 손자국과 함께 만날 수 있는 것은 물론, 비겔란의 조각 공정을 유추할 수 있는 코너를 통해 일반인들도 조각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비겔란 조각 공원’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된 ‘모노리스’.
◇작가 숨결 담긴 공간, 박물관으로

유럽에서는 예술가의 생가, 혹은 그가 머물며 작품 활동하던 집을 미술관이나 박물관, 기념관 등으로 조성하는 사례를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비겔란박물관의 설립 과정은 유럽에서도 흔치 않은 독특한 방식을 띄고 있다.

비겔란은 사후에야 빛을 본 많은 예술가와 달리, 생전에 이미 스타 조각가였다. 노르웨이 왕궁 인근 기념비를 비롯해 노르웨이 유명 인사들을 조각하며 생동감 넘치는 조각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비겔란은 오슬로시가 그의 기존 작업실이 있던 구역을 재개발하기로 하면서 작업할 공간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오슬로 시민들은 비겔란에게 새로운 작업실을 마련해줘야한다는 기고 등을 신문에 게재하며 지자체에 책임있는 대응을 촉구했다.

 
비겔란박물관 전시 작품.
반대 여론도 있었지만, 비겔란을 지지하는 의견이 더 주류를 이루면서 결국 1919년 오슬로 시의회는 비겔란을 위한 스튜디오를 짓기로 결정했다.

비겔란은 이곳에서 평생 거주며 작품 활동을 하는 대신,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모든 작품을 지역에 남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오슬로의 소유가 된 비겔란의 작품들은 비겔란 사후 스튜디오를 박물관으로 바꿔 선보이기로 했다.

스튜디오는 예산 문제로 공간별 완공 시기가 달라지면서 일부 공간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4년 조성된 또 다른 공간은 독일 바우하우스 영향을 받은 기능주의적 디자인을 띄는 등 차이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 건축학적 융복합성이 건물을 더욱 빛냈다.

1924년 이곳에 입주한 비겔란이 1943년 생을 마감하자 오슬로시는 약속대로 1층 스튜디오를 박물관으로 재단장해 대중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만날 수 있는 서재, 침실, 욕실 등 비겔란의 숨결이 느껴지는 생전 거주 공간 역시 개방했다. 박물관과는 별개로 별도의 가이드 투어를 예약해 살펴볼 수 있다.

 
비겔란 작가가 생전 거주했던 공간.
비겔란박물관과 연결된 생전 비겔란 거주 공간. 그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관심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18년째 박물관 지키는수장, 전문성 주목

뭉크미술관 같은 초대형 미술관·박물관과 달리, 비겔란박물관은 인적 구성이 비교적 소박한 편이다. 박물관과 공원에 있는 조각들을 관리하는 보존가 2명을 뒀다는 점을 제외하면 국내 대다수 작가 미술관과 인력 측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은 경남지역 작가 미술관과 또렷하게 대비된다. 미술관의 방향성을 잡고 제대로 이끌어 주는 관장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도저히 전문가로 볼 수 없는 이가 2년에서 길면 4년 단위로 수장 자리에 앉거나, 그마저도 두지 않는 사례와 달리 미술관의 기둥이 되어줄 관장을 두고 있다.

얄르 스트뢰모덴 비겔란박물관장 역시 18년째 조직의 수장을 맡으며 비겔란을 속속들이 꿰고 어떻게 하면 그를 더 돋보이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인물이다. 얄르 관장이 자신이 집필한 책이라며 건네온 묵직한 비겔란 연구서에서 작가를 향한 애정이 담뿍 묻어났다. 함께 근무하는 학예사 역시 3년짜리 박사 과정을 통해 비겔란 작품 세계를 연구하고 관련 저서를 집필하고 있다.

비겔란박물관은 매년 3개의 기획전을 각 3개월씩 선보인다. 크게 역사적 작가, 근대 작가, 현대 작가 등 3가지 유형의 작가들을 조명하는데 현대 미술 작가들을 조명하는 비중이 높다. 장르적으로는 조각을 비롯해 설치 작업이나 3차원적인 비디오 작업 등 3차원적인 미술을 하는 작가들을 선보이려고 한다.

 
전시 작품 앞에 선 얄르 스트뢰모덴 비겔란박물관장.

 

역사적 작가를 다루는 기획전에서는 비겔란에게 영감을 받았거나 되려 영향을 준 작가 등 어떻게든 비겔란과 관계있는 작가를 다루려고 하지만, 그 외 전시에서는 아무런 관련성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는 국적·성별 등 아무런 기준을 두지 않고, 그저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찾아서 선보입니다. 사실 3차원 작업을 하는 작가라면 어떻게든 비겔란과 연결 고리가 있거든요. 따지고 보면 아무런 관련성을 두지 않고 전시를 선보이는 게 더 흥미로운 것 같기도 합니다.”

얄르 관장이 가장 좋았다고 꼽는 기획전 역시 작가가 비겔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때 나왔다. 비겔란이 아닌 박물관의 건축에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선보인 전시 역시 인상적이었다.

비겔란은 20세기 초 노르웨이를 넘어 유럽지역 큐레이터들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1912년, 자신의 작품을 더는 먼 곳에서 선보이고 싶지 않다며 국제 전시판에서 은퇴한 뒤 오슬로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로댕박물관이 로댕 작품의 ‘공식 복제품’으로 제작해 유럽 여러 박물관에 공급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알려온 것과는 달리, 비겔란 작품은 그의 유언에 따라 보존적 이유를 제외하면 복제품을 만들 수 없어 작품 세계를 알리는 데 제약이 따른다.

하지만 작품의 힘일까, 오슬로를 찾는 관광객 상당수는 ‘비겔란 조각 공원’ 그리고 비겔란 박물관을 찾아 그의 작품 세계를 마주한다. 조각가의 혼을 마주할 수 있는 공원·박물관이 도시에 매력을 더하고, 도시를 찾은 김에 방문한 명소에서 그간 몰랐던 조각가를 알게 되고 어쩌면 사랑에 빠진다. 모두가 꿈꿀 법한 선순환 구조가 지금 오슬로에서 펼쳐지고 있다.

'비겔란 조각 공원'에서 '모노리스'를 만나기 전 마주하는 문 형태의 조형물.
얄르 스트뢰모덴 비겔란박물관장.
“비겔란이 모두의 머리속에 살아있도록”
얄르 스트뢰모덴 비겔란박물관장


“비겔란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숨 쉬며 살아가도록 하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단일 작가를 조명하는 박물관으로서의 지향점을 묻자 얄르 스트뢰모덴 비겔란박물관장이 단번에 내놓은 답이다.

세월이 지나면 잊히는 예술가가 아닌, 후대에도 계속해서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가 남아있도록 하는 게 박물관의 임무다.

이를 위해 비겔란 작품 상설전은 물론 각종 기획전, 강연, 가이드 투어, 연구·집필 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미술 애호가와 대중에게 다가간다.

얄르 관장은 비겔란박물관이 조각 박물관이라는 장르적 특징은 물론, 특유의 공간적 매력을 타 미술관·박물관과 차별화 지점으로 꼽았다.

그는 “비겔란박물관은 건축 당시부터 향후 박물관으로 운영될 거라는 분명한 목적에 맞게 지어져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며 “건축적으로도 신고전주의와 기능주의적 기법을 함께 관찰할 수 있어 흥미롭다”고 설명했다.

비겔란박물관은 이러한 공간적 특성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전시 역시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어 나가려 하고 있다.

얄르 관장은 “뭉크미술관 등 현대적인 접근으로 다양한 전시를 시도하는 곳들과는 정반대적 접근이다. 구식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방식이야말로 우리만의 색깔을 가장 잘 살리는 방법”이라며 비겔란박물관만의 길을 걸어가겠노라 밝혔다.
글·사진=백지영기자 bjy@gnnews.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비겔란박물관 전시작품.
비겔란박물관 한 전시 공간에 비겔란 대표작 '화난 아이'를 통해 조각 공정을 이해할 수 있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비겔란 조각 공원' 내 다리에 설치된 '화난 아이' 등 비겔란의 조각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는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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