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모 논설위원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은 아버지를 졸라 태양 마차를 한 번 몰게 된다. 어린 자식을 거두지 않았던 죄책감에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는 부친에게 태양 마차를 하루 동안 몰고 싶다고 했던 거다. 헬리오스는 이 엄청난 일을 결국 허락하면서 일렀다. ‘길의 첫 부분은 아침이라 가팔라서 말들도 힘들어 하지만 높이 오르면 거칠어진다. 바다와 대지를 내려다 보면 겁이 나고 가슴이 떨릴 거다. 채찍은 아끼고 고삐는 단단히 틀어쥐어라.’
그 염려와 당부를 뒤로하고 파에톤이 마차에 오르자 날개 달린 네 마리 말은 불을 뿜듯한 울음소리로 허공을 차올랐다. 마차가 솟구쳐오를 때의 황홀감도 잠시, 곧 말들이 무섭도록 내달았다. 차갑게 여겼던 별들을 스칠 땐 뜨거워 바다에 뛰어내리고 싶었다. 곧 겁에 질려 고삐를 놓아버렸고 말들은 무턱대고 내달았다. 하늘 높이 치닫는가 하면 대지 가까이 곧두박질치기도 했다. 대지의 물은 모조리 말라버렸고 곡식과 나무는 재로 변했다. 불바다가 된 대지 곳곳에 사막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새까매졌다. 필경 제우스만이 해결할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당 혁신 작업 중인 국민의힘을 바라보다가 파에톤의 태양 마차가 떠오른다. 국민의힘은 지난달 23일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를 혁신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첫 일성으로 ‘와이프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야 한다’고 한 인 위원장이다. 그는 1호 혁신안으로 이준석 전 대표, 홍준표 대구시장, 김재원 전 최고위원 등에 대한 당 징계 해제를 요구했다. 통합 첫걸음이라 설명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 전 대표와 홍 시장은 비웃음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1호 혁신안은 당 지도부가 의결로 수용했다는 의미나마 갖는다.
혁신위는 잇달아 혁신안 3호로 청년에게 공천 인센티브를 파격 제공하자고 제안했다. 비례대표 당선 가능 순번에 청년 50%를 넣자는 안도 내놨다. 인 위원장은 17일 김기현 당 대표와 회동한 직후 지역구 전략 공천을 원천 배제하라는 4호 혁신안을 발표했다. 모든 공천은 상향식으로 하라는 요구였다. 대통령실 인사도 전략 공천은 안 된다는 소리였다. 이같은 2~4호 혁신안, 중진과 지도부 및 대통령 측근의 불출마 또는 험지 출마 제안에 당은 말을 아꼈다. 그러나 불만은 결국 터졌다. 주호영 의원은 험지 출마 요구를 공개 거부했다.
고삐를 쥔 인요한 위원장이 앞으로 어떤 혁신안을 더 쏟아낼지 알 수 없다. 또 그것이 국민적 공감을 얻고 당 안팎의 지지를 받을지도 미지수다. 다만 예상되는 것은 지금까지 1~4호 안의 반응에서 보았듯 혁신안은 당이나 당사자 모두에게 난제일 것이다. 파에톤이 태양 마차를 모는 것만큼이나 힘겨운 일을 인요한은 잘 수행해낼 것인가. 이 시점에서 인요한의 결말이 신화 속 파에톤의 운명과 같으리라 섣불리 예단해선 안 된다. 어려운 길에 말 고삐를 잡은 국민의힘 태양 마차 운행을 잘 마치게 될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삐딱하지 않은 눈길로 그 과정을 바라볼 일이다.
사족이지만, 서툰 파에톤이 마차를 모는 동안 온통 불바다가 된 대지의 불을 끄기 위해 제우스는 벼락을 사용했다. 파에톤의 산화(散華)로 사태가 수습된 셈이다. ‘변신 이야기’에서 오비디우스는 파에톤의 비문(碑文)을 이렇게 썼다. ‘비록 아버지의 마차를 제어하지는 못 했지만 큰일에 도전하다 여기 떨어졌도다!’ 높은 영역을 열어젖히고자 했던 파에톤의 헌걸찬 용기에 방점을 찍는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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