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재 전 서진초등학교장·학부모교육 강사
아득한 어린 시절, 자칭 일·이류중학으로 나누어 시험점수를 받아야 하는데 날마다 거의 6시간 이상 시험을 보고 회초리를 맞았다. 매시간이 공포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백열전등 아래서 한 반에 60여 명의 아이들이 석탄 난로 하나에 의지해 시린 발을 서로 바꾸어 포개가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어느 추운 겨울, 국어와 국사를 잘하는 나는 수학과 음악 이론을 잘못해 옆에 짝지와 서로 윈-윈전략을 맺었다. 국어와 국사를 보여준 나는 약속대로 짝지가 음악 이론을 보여주길 원했으나 시간이 다 돼 가는데도 보여주질 않아 초조가 극에 달한 나는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순간 그는 “아야~”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이 “누구야! 앞으로 나와!” 그리고 선생님은 이유를 듣고 나더니 나를 불러내 손으로 나를 때리고 또 때렸다. 나는 태어난 이후 그렇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어릴 때 아픈 추억으로 나의 장래 희망이 교사로 변했다. 그 후 나는 입시에 수학을 보지 않았던 교대로 갔다.
꿈을 이룬 나는 교직 생활 내내 커닝을 한 아이를 사랑으로 대해 주었고 커닝을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조치를 취했다. 그 후 성인이 된 후에도 그때의 트라우마로 시험지만 받아들면 가슴이 쿵∼쿵 뛴다.
불안은 고통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중·고교 시절 단체로 매를 맞을 때를 돌아보면, 첫 번째 학생과 맨 마지막 학생의 아픈 정도를 따져볼 수 있다. 때리는 선생님의 힘으로 말하자면 첫 번째로 맞는 학생이 제일 아프고 맨 나중에 맞는 학생이 가장 덜 아파야 하는데, 실상은 그 반대다.
인간은 불안을 제일 두려워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또한, 적당한 불안은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므로 ‘건강한 불안의 수준’을 적당히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단다.
세월이 흘러 그 나쁜 짝지가 전화가 왔다. 우리 집 과수원을 사서 아파트를 짓고 싶단다. 전화를 끊자 그 아픈 추억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지금도 손녀의 수학을 가르치면서 그때의 공포가 떠오른다.
이제 일흔이 다된 지금도 나는 수학이 싫다. 모든 걸 회초리로, 완력으로 성적을 올리려고 노력한 당시의 교육환경이 지금도 가슴 아프다.
예쁜 고사리 손으로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손녀를 보니 기특하기만 하다. 추억은 아름다워야 한다는데 때로는 이별보다 아픈 추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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