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초보운전
[경일춘추]초보운전
  • 경남일보
  • 승인 2023.12.0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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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화 시인·진주문인협회 감사
이미화 시인·진주문인협회 감사


누구든 초보시절이 있다.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는 순간 맞은편에서 우회전하던 차와 부딪칠 뻔 했다. 급브레이크를 밟고 좌측으로 핸들을 꺾었다. 단 몇 초간의 짧은 순간이었다. 속도를 줄이지 못한 모닝차량은 원심력으로 휘청하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달려간다. ‘그래 무사한 게 어디야, 이만하면 방어운전 잘 했어.’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앞차 꽁무니를 보니 내 입이라도 콱 막을 듯이 그 무시무시한 초보운전 딱지가 노려본다.

나도 초보시절이 있었다. 첫 직장인 은행에 발령을 받았다. 아침 문을 열면 새벽시장 셈을 치른 비릿한 현금 뭉치가 포대 째 막 들어왔다. 부채처럼 펼쳐 돈을 세고 다발을 묶고 손에 지문이 다 닳을 정도로 돈을 만졌다. 그때 돈이란 화폐가 아니라 단지 일감이었으며 마감시간에 시제가 안 맞으면 아무도 퇴근을 할 수가 없는 참 예민한 업무였다.

그날은 몸이 많이 아팠다. 열감으로 고객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겨우 일을 마무리하고 시제를 맞추는데 십 만원이 모자랐다. 내 월급의 사분의 일인 액수였다. 전표를 꺼내 하나하나 대조하고 기억을 되살려봤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퇴근시간을 놓친 직원들은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채워 넣어야 하나, 미안하고 속상해서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닫힌 뒷문의 벨을 눌렀다.

불쑥 한 아주머니가 돈을 내밀었다. 순간 어깨에 힘이 빠지고 헛웃음이 났다. 시장 본다고 일부를 먼저 드린 분인데 깜빡하고 찾는 돈 전부를 드린 것이다. 포대로 들어온 돈을 헤아리느라 따로 기록을 해놓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아주머니도 집에서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바로 오셨다고 했다. 완행버스 안에서 얼마나 애를 태우셨을까.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두 손으로 꼭 쥐어드리며 죄송함과 감사한 인사를 드렸다. 왕복 두세 시간을 허비하고도 화를 내기보다 다독여주던 고객, 퇴근시간을 늦추면서 함께 걱정해주던 직원,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어 나는 초보 딱지를 떼면서 성장할 수가 있었다.

누구든 어떤 일을 하든 초보시절을 거쳐야 한다. 그러다 자신의 노력과 앞선 사람들의 격려로 나날이 성장하고 여유로워질 수 있다. 신호등 앞에서 멈춘 옆 차를 슬쩍 넘겨다보니 운전대를 움켜쥔 굳은 얼굴이 보인다. 그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나보다. 얼굴색이 국화 폐기처리장에서 본 노오란 꽃 색깔이다. 달빛이 그의 안색을 살핀다. 나도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그에게 응원을 보낸다. ‘조금만 천천히 가요. 곧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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