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시인
겨울이 되면 남해 화전로 거리가 온통 빨간 크리스마스 열매로 뒤덮인다. 일삼아 꾸며놓은 것처럼, 연말연시 캠페인용 사랑의 열매와 똑 닮은 열매가 가로수마다 잔뜩 매달려 있다. 겨울철 남해의 진풍경 중 하나다.
도시에서 자란 필자에게 가로수는 으레 벚나무나 은행나무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남해에 와서 초록 잎사귀와 빨간 열매가 앙증맞은 가로수 길을 처음 보게 됐다. 하도 예쁘고 신기해 꽤 오랫동안 벼르다가 우연히 동행하게 된 원예조경과 교수님께 여쭤보았다.
“교수님, 이 나무가 뭔 나무예요?” 그러자 싱긋 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 “네, 먼나무예요” “아니요, 이 나무가 뭔 나무냐고요?” “먼나무라고요” “네?”
꽃 이름, 나무 이름을 찾다 보면 얼마나 재미있는 순우리말 이름이 많은지 모른다. 제비꽃, 애기똥풀, 며느리밥풀꽃 등 생긴 모양새대로 이름에 걸맞은 이야기까지 갖추 들을 수 있다.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일상과 관련한 거의 모든 분야의 용어가 일본식 한자어로 오염됐지만, 기적적으로 순우리말 이름을 지켜낸 분야가 바로 식물분류학 분야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937년 정태현,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 4명의 학자가 조선에서 자라는 식물 이름을 수집해 국판 169쪽짜리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을 펴냈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한반도에 분포하는 식물 1944종에 대한 학명, 일본명과 함께 해당 식물의 조선어 명칭을 표준화해서 기록했다.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어 모음’(1936) 편찬과 함께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이 책은 즉, 우리 땅에서 나는 꽃과 나무와 풀의 우리말 이름을 지키기 위해 편찬한, 식물학계의 ‘우리말본’이었던 셈이다.
어렸을 때 책에서 ‘나무타령’이라는 강원도 민요를 읽고 외웠던 기억이 있다. 대충 떠오는 것만 나열해도 ‘가자가자 감나무, 오자오자 옻나무, 따끔따끔 가시나무, 십 리 절반 오리나무, 방귀 뀌어 뽕나무’ 등 재미있는 나무 이름이 많았다. 그중 ‘멀리 있어 먼나무, 여기 있다 이나무’도 있었던 것 같다. 만약 우리 땅에서 나는 들꽃과 나무의 이름을 우리말로 정리해 두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먼나무가 뭔 나무예요?’ 처럼 재미난 이야기는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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