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명절마다 밤나무가 주는 교훈
[경일춘추]명절마다 밤나무가 주는 교훈
  • 경남일보
  • 승인 2023.12.2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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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재 전 서진초등학교장·학부모교육 강사
박상재 전 서진초등학교장·학부모교육 강사


힘없이 걸려 있는 마지막 한 장 달력을 쳐다보니 집안의 형님이 잘 쓰던 말씀이 생각난다. 바로 ‘음수사원(飮水思源) 굴정지인(掘井之人)’이란 말이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면 그 갈증을 해소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 근본인 우물을 누가 팠는지 그분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마치 과일을 먹을 때는 과일나무를 심은 사람의 고마움을 생각하라는 뜻과 같다. 그 연하디연한 어린 새싹으로 겨울을 이겨내고 신록으로는 봄을 수 놓고, 짙푸름으로 폭염 속의 그늘을 만들며, 단풍 들어 강산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마침내 힘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는 저 낙엽의 노고를 우리는 잊고 산다. 이제 초로(初老)의 나이가 돼 낙엽귀근(落葉歸根)의 섭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중국 남북조시대 유신(庾信)이라는 문인이 있었다. 유신은 양나라 원제 때 서위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가 사신으로 파견된 사이에 그의 고국은 서위에게 멸망을 당했다. 당시 문단에서 명망이 높은 유신을 아는 서위의 군주는 그를 강제로 장안에 잡아 두고 높은 벼슬을 주었다. 한 해 두 해 오매불망 고국을 그리다 2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늘 고향 생각을 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저 오랜 유자산집(庾子山集)의 징주곡(徵周曲)에 나오며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도 나온다.

오늘의 내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 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의미다. 나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오늘날 내 위치가 어떻게 확립된 것인지를 거슬러 가다 보면 나 자신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제사 때 밤을 올리고 밤나무로 만든 신주를 쓰는데 거기에도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보통 씨앗은 싹을 틔우고 썩고 말지만, 밤은 줄기와 뿌리에 영양분을 모두 보내고도 그 형태를 유지한다. 조상들은 밤의 그 모습에서 고마움과 뿌리를 의식하고 그 근본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쓴다고 한다. 하물며 씨앗 하나도 이럴진대 사람이 그 근본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젊었을 때는 내가 시간을 조종했는데 이제 늙으니 시간이 나를 갖고 논다. 지도조차 없는 인생, 권태로운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바람 불면 한순간에 날아간다. 破甑不顧(파증불고)라 깨진 시루를 돌아보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빳빳한 새 달력을 걸며 작년처럼 또 지키지 못할 다짐을 해본다. 조상님! 못난 후손들 부디 새해에도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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