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400주년을 맞이 한 정인홍의 흔적찾기
[경일포럼]400주년을 맞이 한 정인홍의 흔적찾기
  • 경남일보
  • 승인 2024.01.0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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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
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


조선 왕조시대에도, 분단시대에도 불순한 사상을 근절하기 위해 순정치 못한 글을 없앴다. 책을 태우기도 하고, 글쓴이를 잡아 가기도 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권력자들이 글을 삭제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살벌했던 암흑기를 살아 남기 위해서는 탄압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이런 일이 심심찮게 있었기 때문에 기회주의라고 비난할 수도 없다. 이런 일이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의 시집에서도 해방 직후에 일어났다. 강처중은 윤동주와 연희전문 시절 기숙사의 같은 방에서 지낸 동기이다. 경향신문 기자였던 강처중은 1947년 2월부터 서너 차례 윤동주의 시를 신문에 게재해 세상에 알렸고, 1948년, 정병욱이 갖고 있던 19편과 자신이 갖고 있던 12편의 시로 초판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내면서 서문은 정지용이, 발문은 자신이 썼다. 1955년 윤동주 서거 10주년 기념 증보판 시집이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해 출간될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됐다. 정지용은 전쟁 당시 월북했다는 이유로, 강처중은 좌익인사라는 이유였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1983년에 간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개정판에서 강처중은 ‘서울의 한 벗’이라고 애둘러 표현했다. 그러나 동주의 시집 초판본이 출간되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한 강처중의 존재를 언제까지나 지울 수는 없었다. 어떤 문건이나 서적에서도 완벽하게 지워졌던 그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송몽규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가 1988년에 펴낸 ‘윤동주 평전’에서 였다. 그리고 2016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서 관객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되기 300여 년 전에 정인홍의 서문이 삭제되었다. 남명 사후에 제자들과 지역 유림들이 1576년, 덕천서원을 세우고 이어서 남명이 남긴 시문(詩文)을 수집해 1604년(선조 37) 정인홍의 주도로 ‘남명집’ 초간본을 해인사에서 처음으로 펴냈다. 편찬 책임을 맡은 정인홍이 서문과 발문과 행장을 썼다. 1623년의 인조반정 후에 정인홍이 서인들에게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자 ‘남명집’에서 정인홍의 문자는 모조리 삭제되고, 남명이 쓴 문장도 순정하지 못한 상당 부분은 교정 당하였다. 윤동주 시집의 강처중, 정지용은 좌익이라는 이유로, ‘남명집’의 정인홍은 역적이라는 이유로 이름을 영원히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남명집’에서 정인홍을 지우는 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651년 남인 하자혼 등이 ‘남명집’에서 정인홍의 글을 삭제하다가 분란이 일어났다. 이 훼판사건으로 덕천서원장 윤승경이 물러나고, 한몽삼이 맡았다. 진주 출신인 한몽삼이 무단으로 훼판한 하자혼과 이집을 징계하긴 했지만 정작 ‘정인홍 관련 내용을 본래대로 복원’은 차일피일 미루자 경상우도 사림에서 또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결국 역적 정인홍이 쓴 서문은 삭제되었다. 경상대 오이환 교수는 정인홍 대신에 퇴계, 남명을 모두 오가며 출입한 사람들을 등장시키기도 했단다. 그가 쓴 글은 물론이고, 그의 이름 석 자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아예 지워버리려 했다. 정인홍이 쓴 남명신도비도 역적이라는 이유로 없앴다. 제자들 중에는 자기 문집에서 정인홍을 언급했다가 붙잡혀서 혼이 난 분도 있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정인홍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한 분들이 족보에 기록하기 위해서는 정인홍이 아닌 다른 사람의 휘하에서 한 걸로 바꿔야 했다. 그리고는 모두 잊고 살았다. 정인홍이 죽은 지 400년이 됐다. 복권된 지 120년이 지났지만 그런 사실이 있은 것 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다. 이제는 오랫동안 잊었던 정인홍의 흔적을 하나씩 되찾을 때다. 내암 정인홍이 머물렀거나 다녔던 합천에 도로명 ‘내암로’를 붙이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그의 흔적을 제대로 복원하는 일은 지역의 자존심을 되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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