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설국 여행
[경일춘추]설국 여행
  • 경남일보
  • 승인 2024.01.0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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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경 갤러리 DOO 대표
정두경 갤러리 DOO 대표


여행길에 눈을 만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고 행운이기도 하다. 올해 발족한 여행 모임인 SR(sweet road)클럽의 두 번째 여행은 25인승 대형 리무진 버스로 철원과 한탄강을 둘러보고 포천으로 돌아서 오는 ‘아듀 2023 여행’이었다.

출발 전부터 날리던 눈발은 점점 굵어졌고 여행 내내 함박눈이 내려 금세 풍경은 은세계로 바뀌었다. 그 때 문득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너무나도 유명한 첫 문장이다. 1937년 발표된 이 소설은 일본의 근대소설 중에서도 감각적인 짧은 문장들이 묘사하고 있는 아름다움과 함께 일본적인 세밀함과 서정성의 정수를 담은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때마침 지인이 보내온, 눈 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그 시절의 감성으로 가만히 읽어본다. 백석은 눈이 내리고, 날리고, 쌓인다는 표현으로 ‘푹푹’이란 부사를 다섯 번이나 썼다. 그 시 전체를 관통하는 ‘푹푹’은 꽤나 중독성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38년 일제강점기에 백석이 그 시를 썼다고 생각하니 동시대인으로서 두 문학가가 처한, 극명하게 달랐던 시대적 배경이 대비돼 다가온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눈덮인 설원은 여고 시절에 본 ‘닥터 지바고’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했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복잡한 플롯의 거대한 서사 가운데 유독 지바고와 라라의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에만 과몰입했던 여고생이 떠오른다. 1958년 10월 노벨위원회는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노벨 수상자로 발표했다. 그는 모국 소련의 핍박으로 이틀 만에 수상을 포기하게 되고 1960년 사망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시대상황이 변하면서 1989년에 파스테르나크의 아들이 아버지 대신 노벨문학상을 대리 수상한다.

한 해를 떠나보내는 여행길에서 뜻밖에 축복처럼 큰 꽃송이 같은 함박눈을 만나 나의 상념은 설국에서 백석의 시로, 닥터 지바고로 끝없이 이어졌다. 춥지 않은 기온 탓에 내리는 함박눈을 그대로 맞아도 좋았던 설국 속으로 떠난 낭만의 시간, 우리들은 청춘의 시절처럼 사뭇 들뜨고 설레는 기분으로 여행을 즐겼다.

모든 분야에서 한류의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즈음, 대한민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오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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