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노랫말과 국어사
[경일포럼]노랫말과 국어사
  • 경남일보
  • 승인 2024.01.0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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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
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


두 방송사의 대중가요 경연 프로그램이 경쟁적으로 고공 행진을 하고 있다. 물론 최근의 노래가 많지만 내 유년기 기억 속의 노래들도 들려온다. 내 유년기 노래라면 먼저 떠오르는 게 ‘오동동 타령’이다. 맘보 리듬과 국악 리듬의 녹아듦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꼭 들어맞는 삶의 리듬이 되었던 노래다. 노랫말은 우리말의 어감을 잘 살린 완벽한 시다. 이 노랫말에 마산 오동동을 배경으로 한, 간고했던 시절의 풍류가 배어있다.

가요 황제 남인수의 ‘무너진 사랑 탑’ 노랫말 “…천년(千年)을 두고 변치 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아.” 그런데 가수는 천년을 두고 ‘철련’이라고 발음했다. 규범적인 표준 발음이 아닌 게 사실이다. 남인수 특유의 발성법으로 ‘철려늘 두고오…’ 하며 불러야 오히려 제 맛이 난다. 디귿이나 티읕을 리을로 발음하면 유음화라고 하는데, 니은이 리을로 발음하면 활음조라고 한다. 물론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활음조도 있다. 허락, 희로애락, 적나라하다, 곤란 등이 그것이다. 오뉴월, 시월, 지리산, 폐렴도 활음조이기 때문에 남인수의 ‘철련’은 활음조라기보다 정확하게는 광범위한 유음화 내지 ‘니은의 리을 속음화’로 봐야 할 것 같다. 중학교 시절에, 연세 많은 어느 선생님이 안내(案內)를 ‘알래’로 발음했다. 학생들이 모두 웃었다. 50, 60년대만 해도, 철련이니 알래니 하는 발음을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중국의 증류주를 두고 백주(白酒)라고 한다. 백은 원래 백간(白幹)이었다. 중국어 발음으로는 ‘빠이깐’이다. 이를 우리가 ‘배갈(혹은 빼갈)’로 받아들였다. 니은보다 리을이 더 아름답고 한결 유려하다는 정보가 한국인 집단 기억의 무의식 속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은 배출구나 할인점을 뜻하는 아울렛(outlet)을 ‘아웃렛’으로 표기해야 맞는다고 결정했다. 말도 안 되는 논리다. 원음이 이웃렛이라나? 누가 모르나? 한자어 목단(牧丹)이 모란이 되었고, 중국어 치단(契丹)이 거란이 되었듯이, 우리에게 아웃렛이 아울렛으로 표기, 발음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우리가 전철 역 이름 ‘강남구청’을 ‘칸나무구촌’으로 발음하는 일본인들에게, ‘박항서’를 ‘바캉세오’로 발음하는 베트남인들에게 원음으로 발음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최근에 뮤지컬의 전설인 ‘레미제라블’이 공연되었다. 22개 언어로 만들어졌고, 1억이 넘는 사람이 보았다는 이것을 작사한 이도 지난 연말에 방한했다. 그가 그랬다. 한국어는 특히 아름답다고. 선율이 느껴진다고. 이 이유들 중의 하나가 바로 리을에 있다.

마지막 석양빛을 기폭에 걸고, 흘러가는 저 배는 어디로 가느냐? 비가(悲歌)의 여왕 이미자가 노래한 ‘황포돛대’. 그녀는 이 ‘마지막’을 ‘마즈막’으로 발음했다. ‘마지막’이 정착할 때까지 시대 별로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었다. ‘마즈막’은 마지막의 바로 이전 단계로서 19세기에 전국적으로 쓰였다. 마지막을 처음 발음한 곳이 서울인 것으로, 마지막까지 마즈막이 남아있던 곳이 부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노래의 작곡자(백영호)는 고향이 부산이고, 작사자는 옛 진해다. 서울 출신의 신인 가수인 이미자가, ‘마지막인데요’ 하고 문제를 제기할 군번(경력)이 아니었을 거다. 마지막 남은 마즈막, 하루 낮의 마지막인 석양빛, 산업화되기 직전의 볼거리 황포돛대가 서로 잘 어울린다. 마즈막이 마지막으로 바뀌는 음운 현상을 두고 전문 용어로 ‘전설 고(高)모음화’ 라고 한다. 이와 같이, 국어학자들의 관심 밖인 트롯의 노랫말 속에서도 국어의 역사가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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