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 (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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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4.01.1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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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코로나 팬데믹과 민창홍 시인의 시(2)
팬데믹 시기에 공적이나 사적이나 공동체 내지 공동체 모임은 철저히 중단이 되었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하고 교회 예배시간의 제약이 주어지고 축제가 사라지고 명절 귀향이 끊기고 혼사. 장례행사가 축소되는 등 모든 공공의 의례가 극소수 가족 중심이 되는 이변을 낳았다.

“청첩장이 날아왔다/ 모바일 속 청춘남녀/ 꽃길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다/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 사진으로만 보란다/ 축하의 뜻만 받는단다.

하필 오후에는/ 친구 모친의 부고장이 날아왔다/ 사회적 사항을 고려하여/ 가족장으로 함을 양해해 달란다.

문상을 가야 하는가/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축하도 애도도 포기하는 밤

그 뜻만 계좌이체 한다.”(시 「봄날의 일기」 전문)

하루 아침에 전통 관혼상제가 찌그러지거나 사라져버리고 만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러잖아도 예식장이 비고 농촌 소멸이 코앞에 닿아있는데 해마다 초등학교가 순서대로 폐교가 되고 동창회가 할 일을 못찾고 있는 중이다. 필자는 팬데믹 이후 이제 국가도 출산부를 만들고 지방정부도 출산애국운동을 최우선하여 부서를 짜고 경쟁을 붙이고 출산율 성공사례 새마을운동을 펴는 등 좀, 나라 지키기 국민 지키기 사업을 진흥의 제1목표로 삼아 나갔으면 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계좌이체는 편리를 주긴 하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 교섭하는 관계를 줄여버린 데서 오는 황량감을 피할 길이 없다. 그리고 장례식장의 썰렁함이 팬데믹 시기의 풍경이었다. 사실 현대의 생활은 비정 일변도이고 나날이 바쁜 실적에 급급한,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것이 일상이다. 거기다 그래도 장례식장에서라도 만나 일가와 친척을 확인하고 관계와 촌수를 헤아리는 것이 전부인데 그것마저 거리두기, 마스크에 계좌이체가 막아버리는 것이었다.엎친 데 덮친 비극이라 할 것이다. ‘축하도 애도도 포기하는 밤’의 비극이다.

학교 수업도 비대면 수업이었다. 간간 대면수업도 있었다.

“처음엔 노는 것이 그냥 좋았겠지/ 교실 뒤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나 놀라게 해 줄까// 연기에 몰두하는 등장인물/ 영혼이 급조된 카메라 앞에서/ 철저하게 숨어 있었지/ 미열이 나고 짜증이 나는 시나리오”(「비대면 수업」)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레는 일은 없다/ 바짝 마른 입도 긴장하는 사랑// 정위치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애타도록 기다리던 사람이/ 먼 발치에서 씩씩하게 걸어오고// 잘 견뎌주어 고맙습니다/ 기다렸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교문에 걸린 대형 플래카드/ 파도처럼 출렁인다” (「대면 수업」)

비대면 수업은 교사들의 컴퓨터 화면 관리가 필요했고 거기서는 낯선 연기도 필요했었다. 학생들인들 얼마나 불편하고 어수선했던 것일까. 대면 수업때는 교문에 프래카드도 걸렸다. 견뎌 주어 고맙다, 반갑다 하는 구절이 다정하게 펄럭였다. 이것도 저것도 미열이 나는 것이고 짜증이 나는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비대면 대면’이 학교뿐이겠는가. 면접시험이 있는 회사에서, 대학입시에서의 비대면 등등 교회의 회합이나 축제의 주요행사 등에서마저 비대면이 적용되었으니까.

보건소에서의 PCR 검사는 장사진이 기본이다.

“줄이 시퍼렇게 갈아놓은 톱/ 원인 모르게 번져가는 저주를 베러/ 산에 갑니다// 코로나 검사를 받고 온 이웃 때문에/ 톱 손잡이에 힘이 들어갑니다// 나무의 살을 뚫고 죄어갈 때/ 점점 질려가는 공포감/ 나무도 생명이었습니다// 나무를 베다 죽었다는 전설을 듣다가/ 산 아래 구급차의 불빛 긴장하면/ 방호복 입은 손이 떨리고//(중략) 뾰족한 잎으로 콧구멍 찌르는 고통// 결과는 내일 문자로 알려줍니다”(「PCR 검사」)

필자도 3번 줄을 서서 3번 다 음성반응이었다. 코를 찌르는 침끝이 따꼼했다. 시에서 왜 산에 가서 톱으로 나무를 베었을까? 그것과 코로나19와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나무에 병들게 한 일이나 코로나가 창궐하게 하는 일이나 다 같이 자연 훼손의 결과라는 점, 우주 생태를 심하게 깨지게 한 인간들의 손과 발이 재앙의 근본임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시의 속 뜻이 깊다.

인간들은 그러므로 지구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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